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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와 어깨 춤이 절로~ 부안농악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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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와 어깨 춤이 절로~ 부안농악을 아시나요?
  • 홍정우 기자
  • 승인 2014.11.21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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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수 부안농악 보존회장
- 1987년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정 호남우도농악 상징 급부상
- 풍물패가 부자집서 집안의 안녕 위한 굿으로 식량 구하면서 시작
- 1960년대 설장고 명인 故이동원 선생 주축, 現이옥수씨 통해 보전

역사와 유래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식에서 문화융성을 천명하고 문화가 돈이 되고 산업이 되는 문화중심의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지역적 특성이 강한 전북은 판소리와 농악, 부채, 한지, 한식 등 다양한 문화자원이 산재해 있어 지역 전체가 하나의 큰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 중에서도 호남우도농악의 대표격인 부안농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어깨가 덩실거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농악의 유례는 어떻게 될까?

본래 풍물패 치배는 당골네나 쟁인, 하인들이 천석군, 만석군인 부자집에서 집안의 안녕을 위해 지신을 밟고 굿을 쳐주면 곡식과 먹을 것을 주면 그걸로 연명하며 굿판을 벌여 왔다.

1737년 영조 때 암행어사 원경하(元景夏)는 전라도 부안에서 두레 풍장굿을 치는 것을 보고 제2의 정여립인 대동굿이 될까 싶어 농악기를 압수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저들이 전국팔도의 치배를 불러 모아 조선총독부 뒤뜰에서 전선농악대(全鮮農樂隊)를 만들어 연예인으로 탈바꿈시키면서 가락이 흩어지고 섞였으며 그 뒤에는 서커스단과 함께 여성농악단(女性農樂團)이 만들어져 채색을 갖춘 치복이 나오게 됐다.

전라도 농악에는 좌도와 우도농악이 있는데 특히 우도농악은 전라도 서부지역의 농악을 가르키며 이들 지역은 익산, 김제, 부안, 고창, 정읍, 영광, 장성, 함평, 나주, 장흥, 강진 등지이다. 우도농악이 발달된 곳은 옛날부터 살기 좋은 곡장지대였으므로 농사소리와 풍물굿과 같은 농민문화가 발달했다.

우도농악의 기법은 주로 느린 가락이 많으나 빠른 가락도 곁들여 있어 비교적 가락이 다채롭고 개인기에 치중한다. 특색으로는 윗노름에 치중하지 않고 밑노리(발놀음) 가락이 다채롭고 멋져 여자로 비유하면 된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우도는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였고 또 조선시대 말부터는 특히나 왕실을 지탱해 온 국가세수(稅收)의 원천이었다. 전주의 서쪽인 익산, 옥구 만경, 부안, 고부, 정읍, 고창 등 호남벌에서 생산된 쌀은 옥구(지금의 군산)창이나 만경 성당창, 영광 법성창 등을 통해 배로 옮겨지건 직접 상납됐던 곳이었다.

그래서 우도가 다른 곳보다 더 두레가 드세었던 곳이었던 것도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마을마다 두레꾼들이 상당수가 있었고 두레꾼이 가는 곳에는 크게는 용당기(龍唐旗), 보통은 농기가 펄럭이고 굿이 뒤 따르고 두레꾼의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선조 영조 13년에는 호남별견어사가 암행을 하던 중 굿물을 빼앗았던 사례가 있었다고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전해지고 있다.

이 기록에 보면 호남별견어사가 어떠한 임무를 지니고 호남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부안에 와서 보니 두레꾼들의 굿물이 봉기나 반란에 사용될 수 있었다고 해 굿물을 모두 거둬들여 부안현감에게 맡겼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부안현감이 굿물을 녹여 자기의 배를 채웠던 것이 농민에게 알려지고 또 이듬해에 암행어사에게 알려졌던 것이다.

영조 때에는 수리시설이 좋지 않아 삼남지방에 대한 재해나 기근이 잦아 구호미(救護米)를 보내거나 세금을 삭감해 주거나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던 일이 많았다. 금주령이 내렸을 때에는 굿물을 관청에서 몰수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굿을 치지 못하게 했고 술판도 벌이지 못하도록 했다.

어쨌든 사료에 정확하게 기록돼 있느냐에 앞서 전라도 서부지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두레조직이 있었고 혈기왕성한 젊은 두레꾼들이 모여 굿을 쳐왔다는 것이 사실이다.

굿을 치는 때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농삿일을 많이 했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굿은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나타냈던 삶의 총체적인 표현수단이 됐으며 굿 가락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부안농악은 지난 1987년 12월 전북도 무형문화재 재7호로 지정받은 호남우도농악의 상징적인 대표 농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안농악은 설장고 명인 故이동원(李東元) 선생을 주축으로 35명의 농악대로 구성됐다.

이동원 선생은 1933년 12세부터 고창에서 거문고 명인 신쾌동 선생에게 장고가락과 농악을 배우기 시작해 15세부터는 정읍에서 장고의 1인자 김홍집 선생으로부터 장고가락을 배웠고 1956년도에 부안의 김경천, 박남식 등과 부안여성농악단을 창단해 전국을 무대로 순회공연을 펼치는 등 본격적인 부안농악을 육성해 왔다.

▲ 1961년 전북팀 대통령상 수상
부안농악은 1961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이동원 선생이 전북도 대표 농악단 설장고로 출전해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전라예술제 대통령상, 전주대사습놀이 차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또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주최로 국립국악학교에서 호남우도농악 발표회를 갖기도 했으며 부산시민문화회관 초청공연을 비롯해 재일 거류민단 초청 재일교포 및 미국 LA교포 위문공연 등 다양한 공연을 펼쳐왔다.

▲ 부안행복풍물단 입단식
부안농악은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를 지낸 라모녀씨가 부안농악 상쇠로 활약하고 있으며 설장고는 이동원 선생의 아들이자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부안농악 보존회장 이옥수씨가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부안농악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부안농악의 판굿은 꽹가리를 치면서 둥글게 도는 오채질굿을 비롯해 빠른 가락을 치며 겹겹으로 둥글게 돌며 안바탕 나선형으로 감 돌아가는 오방진굿, 호 호흥을 돋우며 구호를 부르며 도는 호호굿 등 음악과 춤 놀이가 한데 어울리는 흥겨운 민중오락인 민족종

▲ 풍물강습 중인 이옥수 부안농악 보존회장
합예술의 원형 그대로 전승 보존되고 있다.
부안=홍정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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