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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선생 5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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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선생 5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 김미진
  • 승인 2006.04.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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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근우회,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 항일운동가 박차정(朴次貞, 1910.5.7-1944.5.27)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0년 경남 동래에서 부친 박용한과 모친 김맹련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난 선생은 일찍부터 부모와 친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 숙부 박일형 등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아울러 기독교 사상은 사회 활동은 물론 독립운동의 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일신여학교 재학 중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했고,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면서 독립의지를 표출하여 갔다. 특히 여성의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지도층으로 부상했다.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했다. 근우회는 학생운동에도 관여,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다. 주도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시위 직후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193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했다.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한 선생은 이듬해에 거처를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남편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했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했다.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그 지원단체로 남경조선부녀회를 조직, 여성들을 민족독립운동으로 끌어들였다. 1937년 좌익 민족운동세력의 결집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동참했고, 1938년 조선의용대에도 참여했다.

 특히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 선생은 김원봉이 좌우합작 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던 시기인 1944년 5월 27일 부상 후유증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광복회(☎02-780-9662)와 독립기념관(☎041-560-0114)은 이달 한달 동안 선생의 인물 사진과 공적 관련 사진을 전시하며,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도 선생의 생애와 독립 운동을 테마로한 학술 강연을 펼친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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