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9 23:07 (월)
비렁길
상태바
비렁길
  • 전민일보
  • 승인 2023.03.31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원수 기둥 하나가 뒤에서 갑자기 내 자동차를 들이받았다. 그날 오후 나는 박물관 뒤뜰에서 햇살을 잠깐 즐겼다. 안전띠를 단단히 메고 뒤로 차를 빼는 순간, 조금 전에 없던 자동차 하나가 통로에 들어와 있는 것을 몰랐다. 순간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당황하여 엑셀을 밟았던 것이다. 뒤차의 앞쪽을 조금 받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안전한 곳에서였다.

삶에도 이런 비렁이 곳곳에 숨어있는 것을, 죽도록 수업료를 지급해야 하는 인생길인 것을 잠시 잊었던가. 자동차 사고 체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무도 몸을 다치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생 흑자라 했다. 큰 이득을 본 셈이었다. 비렁길 걷기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던 터.

여수 금오도에는 이름난 해안 둘레길 ‘비렁길’이 있다. 왜 비렁길인가, 걸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비렁이란 말은 벼랑이란 순우리말의 그 지방 방언이었다. 아직 비렁길을 생각하면 가끔 아찔한데, 무사히 다녀온 것을 이렇게 셈을 치르게 하는 것이러니 싶었다. 가기 힘든 길이어서, 비렁길 5코스 중에서 가장 절경인 3·4코스를 걸었다. 절경인 만큼 길도 험하고 가파르기도 했다. 벼랑이 있는 곳엔 반드시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남녘의 바람은 벌써 꽃바람이었다. 돌산대교를 건너고 쉼터에서 만난 매화와 동백이 새봄과의 첫 상봉 같았다. 푸른 하늘에 점점이 뜬 흰 구름 속의 산수유 꽃가지, 땅에는 봄까치꽃, 제비꽃 등, 생동감이 넘치는 봄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돌산도를 돌면서 훈풍에 실려 오는 바다를 가슴에 채웠다. 바다에 뜬 하얀 부표가 꼭 하늘의 흰 구름송이 같기도 하고, 가까운 부표는 백조 무리 같았다. 김병종 화가의 바다 그림이었다. 지중해 바다 속을 헤엄치는 어린아이들이 부표처럼 떠 있던 꿈의 바다.

돌산읍의 신기 항에서 금오도까지, 뱃길 25분 동안 작은 섬들이 점점이 어울려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다도해임을 절감한다. 여천 항구에서 심포까지 버스로 오면, 갑판으로 시작하는 4코스 도보 길이 시작된다. 바위와 벼랑이 절묘하게 어울린 봄빛을 품은 해안이 아름답다. 달콤한 꿈속을 걷는 길이 이런 맛이지 싶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평평한 길이 이어지고 가파른 길 위에 오르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어서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즐겁다.

섬 깊은 계곡에 칼로 자른 듯한 두 벼랑 벽을 잇는 출렁다리가 있다. 중간 지점에 밑을 내려다보는 유리 발판이 있다. 천길 좁은 벼랑 아래에서 거친 물결이 출렁인다. 걸음 떼기도 아찔하다. 해안의 돌출된 비렁에는 어김없이 전망대가 있다. 숨 가쁘게 오른 전망대에서 안도의 숨을 토하며 바라보는 해안, 먼 바다, 수평선 너머를 그리면서 다음 길을 걷는 힘을 얻는다.

땅을 바라보면서 오직 걷는 것 외에 다른 잡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명상 길이다. 땅바닥에서 조용하게 발길을 붙잡는 제비꽃도, 노란 민들레도 동백 못지않게 봄의 밀어로 위안을 준다. 기막히게 휘어진 곡선의 뿌리를 땅 위로 드러낸 나무를 보고 과연 꽃과 잎만 보고서 어찌 나무를 보았다고 하랴! 알 수 없는 신비한 생의 여정이란 것만 짐작한다.

4코스가 끝나는 지점인 학동마을에는 쉼터가 있다. 솔직히 4코스만 걷는 것이 적당했는데, 처음부터 목적한 바, 일행이 없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3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매봉 전망대 오르는 길이 가장 힘들었다. 물러설 수도, 더 가기도 어렵지만, 묵묵히 걸었다.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지 않는가. 거기만 오르면 목적지까지는 내리막이란 것, 벼랑 바위에 놓인 친절한 갑판 계단을 하나하나 거친 숨 내쉬며 밟고 드디어 매봉 전망대. 훤히 트인 삼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서 바다와 사람도 느껴지지 않는 넋 나간 순간을 잠시 누렸다.

내리막길도 굽이가 있기 마련, 만만치는 않았다. 종점인 직포마을에 닿으니 방풍나물 밭이 많았다. 비로소 섬사람들의 생활이 그려졌다. 삶에서도 수많은 비렁길을 걸어왔음을 새삼 생각했다. 젊어서는 비렁인 것을 모르고 쉬이 달려올 수 있었던 길도 많았지 싶었다. 젊은이들은 2시간이면 걷는 길을 우리는 5시간 놀며 걸었다.

그냥 순탄한 길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평탄한 길은 재미도 없고 지루하여 육체를 단단하게도 하지 않는다. 인생의 비렁길이 영혼을 살찌운다는 것을 세월 지난 뒤에 알았다.

조윤수 수필가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2024 WYTF 전국유소년태권왕대회'서 실버태권도팀 활약
  • 기미잡티레이저 대신 집에서 장희빈미안법으로 얼굴 잡티제거?
  • 군산 나포중 총동창회 화합 한마당 체육대회 성황
  • 대한행정사회, 유사직역 통폐합주장에 반박 성명 발표
  • 이수민, 군산새만금국제마라톤 여자부 풀코스 3연패 도전
  • ㈜제이케이코스메틱, 글로벌 B2B 플랫폼 알리바바닷컴과 글로벌 진출 협력계약 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