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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길가메시(Gilgamesh)의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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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길가메시(Gilgamesh)의 울림
  • 전민일보
  • 승인 2015.04.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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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칼럼니스트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년(1609년) 8월 1일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조(宣祖) 계묘년 감시(監試) 때 시관(試官) 이성길(李成吉)은 자신이 시지(試紙)에다 ‘근봉(謹封)’이란 두 글자를 써서 미리 그 친구인 이정험(李廷?)의 아들에게 주었고, 시관이 되어서도 역시 사정(私情)을 많이 부렸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다. 법으로는 마땅히 파방(罷榜)을 해야 했는데 유영경(柳永慶)의 아들 업이 장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파방을 하지 않았다.”

인맥과 시험부정 그리고 권력 고위층의 비호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진 드라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다 죽은 유영경이 광해군에 의해 폄하되고 있다는 느낌은 없지 않지만 사실 자체는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것이 조선에서 만의 문제라거나 아니면 한국문화 전반에 흐르는 연고주의를 대표하는 사건이라 얘기할 생각은 없다. 어찌 이것이 한국사에만 등장하는 문제일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내게 했던 말처럼, ‘아니 자신과 알고 친한 사람에게 좀 더 잘해주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그렇다. 사람 사는 세상, 결국 귀결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맨 파워.’그 말이 의미하는 모호함을 넘어 정확한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옛적이라 해서 특별히 달랐을 리 없겠지만 이해와 관계가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그 중요성이 더 해감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한 탤런트는 방송에 나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내 전화에 입력된 사람이 3,000명이 넘는다.”참으로 놀랍다. 내 손전화기에 입력된 숫자는 그 10분의 1도 안 된다. 그럼에도 머리가 좋지 않은 나는 가끔 입력된 전화번호 이름을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지’ 하지만 더 황망한 것은 따로 있다. 그 수백명 중 막상 편하게 전화할 수 있는 대상은 몇 안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 대다수는 특별한 용무가 없는 내 전화에 의아함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그들 잘못은 아니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친구 사이인 이성길과 이정험의 관계는 돈독해 보인다. 단순한 인맥으로 설명하기엔 이성길이 남긴 오명(汚名)이 너무도 크지 않은가. 그래서 사관(史官)은 그것을 사정(私情)으로 표현했을까. 나를 당혹하게 했던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 속에서 내가 봤던 그림자도 다르지 않다. 그 말을 하는 당사자가 믿는 누군가가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갑(甲)과 을(乙). 그리고 을로 살아야하는 시점의 어느 순간 우리에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 중에는 소외된 인맥의 그늘은 없는 것인지 되돌아본다.

그것은 ‘을(乙) 중 을(乙)’이 돼버린 내 자신의 기억 속에도 존재한다.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내가 느꼈던 고독감과 패배감의 근원도 그것에 서툴고 게을러서 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지우지 못한 의문은 여전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화번호 속 그 누구에게도 선뜻 전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에 대한 가장 중요한 책임은 물론 나 자신에게 있다. 고민은 계속되겠지만, 나는 살아가는데 인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그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느꼈던 서먹함 앞에서 확인한 것이 있다. 인연의 고리는 생각보다 약하다. 그 중 제일 약한 인연의 고리를 우리는 인맥이라 부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우리가 못내 키워나가고자 하는 인연의 고리 역시 인맥이라는 사실이다. 친구도 지키기 어려운데 인맥은 말해 뭣하겠는가.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와 사별한 그리고 그를 다시 살려낼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는 길가메시(Gilgamesh)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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