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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낯선 기억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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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낯선 기억의 저편
  • 전민일보
  • 승인 2015.01.1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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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칼럼니스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복한 한 여인이 구치소에 있다. 그 안에서 조차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우울증에 괴로워한다는 소식도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와 관련된 얘기들은 이제 과할 정도다. 그에 더해 작고한 그녀의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왔다.

여러 신문 칼럼에 나왔던 그녀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나 역시 오래 전 들어 알고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 한 분이 들려주셨던 부자에 관한 교훈적인 가르침 바로 그 내용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낡은 트럭 한 대를 가지고 미군부대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다. 성실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았던 그에게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온다. 경인가도에서 운전 중이던 그의 눈에 한 외국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차가 고장 나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모두 외면하고 그냥 지나칠 때 오직 그만이 차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차를 고쳐준다. 전쟁의 폐허와 그로인한 공포가 상존하던 그 시기다.

사례비를 거절하는 그에게 그 외국여성은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명함 한 장을 건넨다. 그에게 찾아온 인생역전의 순간이다. 그 명함이 안내해준 사람은 바로 미8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구치소에 있는 그녀로 인해 ‘땅콩항공’이 돼버린 그 회사의 창업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朝鮮) 태조(太祖)는 ‘왕자의 난’으로 벌어진 골육상쟁 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삼한(三韓)에 명문가가 얼마나 많은데 그들이 우리 집안을 뭐라 할 지 내가 낯을 들 수 없다.” 왕조를 창업한 군주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그래서 후대왕에 대한 경계의 말을 잊지 않고 있다. 하물며 일개 재벌이 돈이 많다한들 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것이 그 당사자에게 남기는 것은 얄팍한 갑의 지위,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도 그녀와 그녀의 집안을 향해 명문가라 얘기하지 않는 이유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미군부대 청소부였다는 사실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미군부대 청소노동자였던 그녀의 할아버지가 갑이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태어나면서부터 갑이 되었던 것인가. 이제 그녀를 놓아주자. 그럼 이제 우리 주변에는 더이상 기괴한 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평안하게 살 수 있었던 삶을 스스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친구다. 자신과 양심 그리고 주변인물과의 관계에서 적당히 타협했다면 나름 갑의 위치에서 살았을 그를 슬프게 만든 것은 그가 일상에서 만나는 주변인들이다.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퍼붓는 모욕과 조롱. 친구는 대화 말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땅에서 왜 무장 좌파가 등장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난 친구에게 이렇게 답했다. “이북에 이미 충분히 많잖아.” 위로 겸 유머로 한 얘기지만 하는 나나 듣는 친구 모두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을 오랑캐라 여기는 사람이 적잖지만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황제들을 배출한 왕조가 청나라다. 강희제(康熙帝)의 아들이자 건륭제(乾隆帝)의 아버지인 옹정제(雍正帝)는 이렇게 얘기한다. “군주가 되는 일은 어렵다.(爲君難)”

거기에 더해, 옹정제는 최고의 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을 향해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나 하나에 달려 있고, 천하가 나 하나를 받들게 하지 않으리.(原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 왜 옹정제를 중국 최고의 황제 중 한 명으로 꼽는가.

그는 자신의 다짐처럼 황위에 있는 동안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정사에 몰두했다. 그리고 최고의 갑이었으면서도 결코 갑질 따위에 자신과 역사를 소모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지금 그 누가 옹정제 이상의 갑을 자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제 물어보자. 당신은 완벽한 갑(甲)인가. 미련한 내겐 완벽한 갑이 보이지 않는다. 미군부대에서 청소노동자로 있던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면 그녀가 구치소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것은 낯선 기억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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