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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義理)와 부채(負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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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義理)와 부채(負債)
  • 전민일보
  • 승인 2014.07.1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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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농촌지도사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일반적으로 경험했을 상황이다. 자대배치 첫날 밤, 지금까지도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신병인 내게 고참들이 퍼부은 한 전역자에 대한 얘기다. 그들의 말속엔 적대감과 조롱이 가득했다. 한 번 본 적도 없는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후로도 그에 대한 얘기들은 비난일색이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다른 얘길 들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모두 비난하지만 그가 내겐 참 잘해줬다. 제대 후 졸병 면회와서 밥까지 사준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흔한 얘기로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아닌가. 비록 그가 ‘만인의 적’일지라도. 그래서 그것은 마음의 빚이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그를 보호해야한다.’는 논리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온나라가 찾고 있지만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유병언을 찾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어찌 이뿐인가.

서울시의원이 연루된 살인과 살인청부 퍼즐조각도 ‘나를 알아준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의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조폭의 의리는 의리가 아니다’고 하지만 당위와 존재 사이의 간극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것은 비단 필부(匹夫)들에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가지는 부채의식과 그에 대한 보답은 재앙을 초래한다.

선조(宣祖) 9년 6월 24일, 왕은 한 권의 책을 읽고 몹시 분개한다. 과연 어떤 책이었을까. 왕을 대노하게 만든 그 책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육신전(六臣傳)]이었다.

선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중략(中略), 이들은 아조의 불공대천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얘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

이때 영의정 홍섬(洪暹)과 다른 신하들의 읍소로 명은 거둔다. 사육신(死六臣) 처형 후 120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날에 대해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전에 김종직(金宗直)이 성종(成宗)에게 ‘성삼문(成三問)은 충신입니다.’라고 하니 성종 역시 놀라 낯빛이 변했다.

이에 김종직이 ‘불행히 전하께 변고가 있으면 신(臣)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제야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 금상(今上)에게 이런 응대를 한 신하가 없어 애석하다.” 세조(世祖)의 손자인 성종과 성종의 증손자인 선조.

사육신 사건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던 성종에 비해 훨씬 후대인 선조가 보인 반응은 왕의 그릇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알려진 대로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가문이 멸족됐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모와 처첩 그리고 딸들은 공신들에게 비(婢)로 배분된다.

그런데 박팽년(朴彭年)만이 후손을 남기게 된다. 사건당시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는 임신중이었다.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렸는데 다른 종이 낳은 딸과 바꿔치기 한 것이다. 아이는 종의 아들 ‘박비’로 자라다가 성종에게 자수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일산(一珊ㆍ유일한 옥구슬)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다.

이미 성종대에 사육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종의 증손자인 선조가 역사를 되돌리려 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방계(傍系)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과도한 반발이었을지 모른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일 뿐 아니라 한명회(韓明澮)의 사위다. 또한 신숙주(申叔舟)는 성종의 종묘 배향공신이다. 사사로운 의리로 한다면 어찌 선조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조가 실패한 것은 등극(登極) 그 자체가 아니라 공신(功臣)들에게 권력으로 보답한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등장하는 공신을 관리하는 것이 옛날 얘기일 수 있겠는가.

(사족 하나, 박팽년 후손 중에 대한민국 국회의장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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