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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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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전민일보
  • 승인 2013.10.2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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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된 무예도보통지는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백동수(白東脩, 1743~1816)에 의해 편찬되었다. 무예도보통는 선조 31년(1598)에 한교(韓嶠)가 편찬한 6가지 무예로 이루어진 무예제보와 영조 35년(1759)에 사도세자가 주도하여 편찬한 18가지 무예로 이루어진 무예신보를 모체로 한ㆍ중ㆍ일 삼국의 서적 145종을 참고하여 1790년에 완성된 종합무예서이다. 다른 군사서적들이 전략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임에 비해 이 책은 전투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글로 해설한 실전 훈련서라는 특징을 매주 소개해본다. / 편집자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의 제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가 어명으로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백동수(白東脩)에게 저술하도록 한 책이 무예도보통지이다.
정조의 이름은 산이다. 이름을 셀 ‘산’자로 숫자를 센다는 의미가 있어 정조가 총명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근래에 방영된 ‘이산’과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를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여 유명해졌다. 그러나 방영된 사극이 논픽션(nonfiction)이다 보니 사실과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무예도보통지 원문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무예도보통지 원제목은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이다. 여기에서 ‘어정(御定)’이란 뜻은 임금 ‘어(御)’자와 정할 ‘정(定)’자이다. 임금이 정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토록 명한 것은 국력을 키움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가 영조(英祖,1694~1776)에 의해 뒤주에 가두어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정조의 나이 겨우 11세 때의 일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는 두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첫째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 의한 당쟁의 희생설이 있고, 또 하나는 사도세자가 광(狂)증설이 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서서히 죽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것은『한중록』과『승정원일기』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조는 1694년 숙종(肅宗, 1661~1720)의 둘째 아들로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9년에 연잉군에 봉해졌고 1717년 숙종에 의해 대리청정을 하고 1721년 왕세자에 책봉되며 1724년 8월 이복형인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 제 21대왕이 되었다.
영조가 즉위할 때에는 소론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사실은 영조는 노론세력에 의해 등극하게 된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당파 간에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각 당파에 인재를 고르게 등용 하려는 탕평책을 펴려고 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으나 결정적 계기는 1727년 ‘정미환국’을 겪으면서 영조의 탕평책은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으로 자신이 서자라는 것에 대하여 항상 열등의식이 있었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사도세자는 1744년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혜빈 홍씨는 1795년 남편인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쓴『한중록』을 남겼다.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보이면서 궁녀를 죽이는 사건, 여승을 입궐시키거나 궁궐을 빠져나가 평양에 다녀오는 사건 등이 발생하여 1762년 정순왕후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의 비행 10가지를 들어 상소하니 영조는 세자에게 스스로 죽으라고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죽였다.
정조는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 22대왕으로 등극하면서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는 한편 조정의 당파를 없애려 하였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는 탕평책을 썼으며, 규장각을 넓히고 인재들을 모아 외척들과 환관들을 견재하며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갔다. 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한편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 지금의 수원성을 건설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조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도 군사력의 힘을 절실히 인식 했을 것이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통하여 일본에게 무참히 금수강산이 짓밟히는 속에서 군권의 약화로 인하여 당해야만 했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인조(仁祖,1595~1649)의 삼전도(三田渡) 치욕을 겪으면서 국력의 쇠퇴함과 군사들을 훈련시킬 제대로 된 병서가 없음을 알았고, 또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영조 25년에 대리청정 할 때에 죽장창(竹長槍)등 12기(十二技)를 더하여 도보를 만들어서 6기(六技)와 함께 병사들에게 훈련을 시겼고, 또한 사도세자의 뜻에 따라서 지금의 18기(十八技)의 명칭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조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저술케 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박사·(사)조선어정무예협회 이사장 김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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