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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의 독립운동가 유동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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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의 독립운동가 유동열 선생
  • 전민일보
  • 승인 2008.08.0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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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유동열(柳東說)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매화리에서 아버지 유종식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4년부터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활동하며 육군 기병정위, 육군참령 등을 역임한 선생은 이갑, 이동휘, 노백린 등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무관들과 비밀 결사인 효충회(效忠會)를 조직했다.
 대표적인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를 비롯하여 서우학회와 서북학회 등 애국계몽단체에 평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09년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0월 직접 국내로 잠입하다가 일본헌병대에 피체되었고, 다시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 혐의로 191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 1918년 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으로 1년 반 동안 활동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휘와 함께 이르크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립했다.
 선생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한 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중국과의 연합단체인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했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당되자 당의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장으로 활동했다.
 또, 선생은 임시정부 군사위원을 역임하고 1939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참모부장으로 선임되어 군사계획을 수립, 추진하는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 후 선생은 참모총장이자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는 통수부의 막료로서 광복을 맞이하는 그날까지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한 선생은 미군정의 제의를 받아 통위부장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군사권을 이양한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0월 18일 평안북도 회천에서 순국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가며 조국광복과 건군의 기틀을 마련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이달 말까지 제1전시관(민족전통관) 출구에서 ‘대한제국 군인으로 활동할 당시의 선생’ 등 16점의 자료를 통해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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