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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년> "당시 팽목항은 무거운 정적,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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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년> "당시 팽목항은 무거운 정적, 그 자체였습니다"
  • 임충식 기자
  • 승인 2015.04.15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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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재난대응봉사대 ‘세월호 1주년’을 말하다
▲ 맨 우측부터 적십자 전북지사 재난대응봉사대 오귀열(63·협의회장), 문승현(59·정읍지회장), 박준의(47·전주지회장)씨.

“팽목항에 흐르던 무거운 정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적십자 전북지사 재난대응봉사대 오귀열(63·협의회장), 문승현(59·정읍지회장), 박준의(47·전주지회장)씨는 1년 전 팽목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긴 한숨부터 나온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오열과 절규는 아직도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들이 바라본 세월호 참사 현장은 ‘비참’ 그 자체였다.

오귀열 협의회장 등 봉사대원들과 적십자 전북지사 직원들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다음날 급히 팽목항으로 출발했다. 현장은 뉴스로 접한 것보다 심각했다. 천막도 설치돼 있지 않았고, 실종자 가족들에게 줄 급식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노인행사를 위해 남원으로 가던 급식차를 급하게 팽목항으로 돌려야할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당시 정부와 해경의 미온적인 대처로 인해 가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조심해야했다. 두 달 간 침묵의 연속이었다.

유가족들을 위한 식사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된 일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일을 마친 뒤에는 차안에서 추위와 싸우며 새우잠을 자야했다.  그러나 더욱 힘들었던 것은 누적되는 피로도, 생업을 잠시 접으면서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도 아니었다. 유족들의 슬픈 눈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가는 유족들의 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오귀열씨는 “배식을 하면서도 유가족들과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똑 바로 쳐다보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했고,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유족들의 건강도 걱정이었다.  문승현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유족들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희망이 사라지면서 급식소를 찾는 유족들이 줄어들었다”고 “봉사대원들을 직접 식판을 들고 유족들을 챙겨야만 했기 때문에 급식시간도 따로 없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박준의씨의 경우 세월호 참사 발생 후 4개월 가까이를 팽목항에 머물렀다. 열악한 환경이 지속되면서 봉사자수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박 지회장은 “유가족들을 뒤로한 채 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긴 시간을 팽목항에서 보내면서 희망이 절망과 분노로 바뀌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봤다. 또 절망이 ‘제발 시체라도 찾게 해달라‘는 간절함으로 변하는 것도 봤다. 박씨는 “자기 아이인데도 만질 수도 보지도 못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체라도 돌아와주길 바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도 형용할 수 없는 착찹한 심정이 느꼈다”면서 “그들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만 1년이 된다. 하지만 이들의 기억 속에는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금도 세월호 뉴스만 나오면 가슴이 아파,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들은 “다시는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며 “국민 모두가 세월호가 가져다 줬던 슬픔과 분노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임충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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