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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우리네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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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우리네 풍습
  • 전민일보
  • 승인 2009.08.31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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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날 오곡밥을 싫어했던 나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흰밥을 먹었다. 아침나절엔 복순이에게 더위를 파니 나는 기분이 좋았다. 올 한 해는 더위 먹지 않고 무난하게 보낼 것 같아서였다. 어쩌다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한 복순이는 영 풀리지 않는 얼굴로 나를 흘겨보았다. 보름날 상대방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하고 외쳤다. 그러면 한 해 동안 상대방에게 더위를 주어버리고 시원하게 산다는 것이다. 대답하기 전에 “네 더위 내 더위 맞더위!”를 외쳤으면 좋았을 걸, 복순이는 연신 불평을 했다. “맞더위!”로 응수했더라면 너랑 나랑 더위를 나누어 가질 텐데 왜 그걸 몰랐을까 하며 속상해했다.
 대보름달이 휘영청 밝다. 저고리 동정을 뜯어 망우리에 던져 넣고 타다 남은 불을 넘어가면서 부스럼 탁탁! 부스럼 탁탁! 액막이를 했다. 이렇게 세 번 넘으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숯 잉걸불에 다리미를 얹혀놓고 성질 급한 복순이 언니는 콩을 볶아먹었다. 동생에게 더위를 판 내게는 콩을 나눠 주지 않았다. 사내아이들의 불 깡통이 밤하늘에 불꽃처럼 올라갔다. 하늘에는 어느새 보름달이 휘엉청 밝았다.
 내일부터 일 년 지신밟기 농악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백여 호를 돌다보면 곡식도 돈도 꽤 모인다고 했다. 동네 자금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정월 대보름은 이런 광경으로 지나갔다. 농사철을 앞두고 마을사람들은 신명나게 농악놀이로 마음과 몸을 풀었던 것이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올해 영동할매가 딸을 데리고 내려온 모양이다. 분홍치마 나풀나풀 예쁘게 보이려고 그런다나, 며느리는 비라고 했는데 곱게 물들인 명주치마 적시라고 그런다니 바람신인 영동할매조차 며느리가 미웠던 모양이다. 고부간의 갈등은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일까. 아무튼 딸보다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오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새 생명이 올라와야 할 대지에 바람보다는 비가 훨씬 낫기 때문이다.
 땅은 농사꾼에게 절대적이다.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뒷동산에 올라 정갈한 흙을 한 대야 정성스럽게 담아다 대문 앞에서부터 한 줌씩 마당 양쪽으로 뿌려가면서 영동할매를 맞는다. 이런 의식은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할 곡식을 길러주는 흙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살강에 대나무를 꽂아 놓고 오색헝겊을 만들어 매단 곳에 영동할매를 모셔놓는다. 아무리 보아도 할매가 보이지 않을 우리아이들은 자꾸만 할매가 어디 있느냐고 귀찮게 묻기에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제각각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안 보인다고 하면 착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보인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큰딸은 보인다고 거짓말을 하고 작은 딸은 아무것도 없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자라고 보니 큰딸은 제가 손해 보면서도 양보하는 편이고 작은 딸은 제 의사를 굽히지 않는 강한 성격을 가진 것을 보면 설화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도 성격의 단면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영동할매는 이월 한 달 두어 번 오르내린다. 그때마다 정성을 다하지 못하면 잘 삐지셨다. 영동할매 비위를 건드리면 영락없는 눈병이 찾아오는데 골목에 깨어진 사금파리로 솥단지를 걸어놓고 누군가 발길에 채이면 눈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집집마다 소원을 안고 모셔두었던 바람신인 영동할매는 오색헝겊 대나무 소지를 타고 다시 천상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이월이 지나가면 들판은 푸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어느새 제비가 찾아와 처마에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삼짇날 음식장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제비는 찾아오지 않는다하여 떡을 하지 못하면 전이라도 부쳐 윗목에 차려놓고 비손을 했다. 제비를 일찍 보면 한 해 재수가 좋다고 했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면서 제비마중을 들녘으로 나가지만 날아다니는 짐승이 마음대로 될까, 처마 끝 제비집 지을 곳에 미리 받침대를 만들어주었던 순만이네 아버지는 자기 정성도 생각하지 못하고 늦게 온 제비에게 화를 냈다고 했다. 제비가 찾아오지 않는 집은 불길한 징조이며 흥부의 보물박씨를 물어다 준 길조이니 기다리다가 화가 날만도 하다. 복권 당첨이 되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처럼 금은보화가 든 박씨를 물어다 줄 제비를 기다리며 사는 것도 부질없는 희망일망정 가난한 농촌을 살아가는데 위로가 되지 않았을지, 아이들은 자기 집 처마아래 제비새끼가 많이 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꽈리 부는 소리로 재잘대던 제비소리는 아이들 깨우는 기상나팔소리로 충분했다. 빨랫줄에 앉아있던 제비의 똥을 맞으면 그날은 외출을 삼갔다. 재수 없는 날이니 조심하라는 제비의 경고라고 했지만 그만큼 제비가 많았다는 뜻도 된다. 농약의 독성으로 먹고 살아야 할 먹이가 없어진 탓도 있지만, 흥부처럼 마음착한 사람들도 없어진 탓인지 강남 갔던 제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카시 꽃향기가 마을 골목까지 내려오면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진다. 부처님을 뵈러 가야 하니 고기 먹는 것을 삼일 전부터 금하고 채소로 아침에 밥 한 상 정갈하게 차려놓는다. 절에 올라가는 어머님들 치맛자락이 훈풍에 날렸다. 절에 갈 때는 언제나 회색빛 치마를 입고 가시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무병장수를 무릎이 닳도록 부처님 전에 빌었건만 아들 딸 먼저 보낸 통한의 세월을 94세까지 이어오고 계신다. 부처님이 싫으셨는지 오래전부터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린다. 잠자듯이 편하게 데려가 달라고.
 
 인생의 이십대를 오월이라고 했다. 심어놓은 벼가 바람에 이랑을 만들어 파도를 친다. 푸른 녹색 물결이 산과 들에서도 춤을 춘다. 푸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월이 변해서 여인들의 그네뛰기도 사라지고 남자들이 냇가 백사장에서 씨름하는 풍경도 사라졌지만, 단오는 우리민족에게 큰 명절이었다. 수리취라는 나물은 뒷면이 하얀색인데 뜯으면 섬유질이 길게 나온다. 그 잎을 깔아놓고 떡을 해먹기도 해서 수릿날이라고도 했다. 창포로 머리를 감거나 상추 잎에 내린 맑은 이슬을 받아 세수를 하기도 했다. 삼단 같은 머릿결을 창포물로 감은 뒤 곱게 빗고 그네를 뛰었다던 어머니의 어머니들, 그렇게라도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싶었을까?
 전주 덕진 연못은 단옷날 씻으면 피부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 아이들은 데리고 자주 찾아갔었다. 시부모님 밑에서 아이들과 나들이를 자연스럽게 나서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골골의 역마다 쉬는 기차를 타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가는 하루여행은 아이들보다 내가 더 신이 났었다. 어느 해 아버님과 어머님이 단옷날 풍남제를 구경하려고 전주로 가셨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어쩌다 헤어지고 말았다고 했다. 하루 종일 속만 태우다가 만나지 못하고 따로 내려오셨는데 그날 밤 내내 두 분이 다투셨다.
 유월 유두는 일 년 중 제일 더운 절기이기도 하지만 곡식이 익어간다는 뿌듯함 때문에 정성으로 밀떡을 해놓고 빌었다. 밀떡은 숙성된 밀가루반죽을 보자기에 깔고 강낭콩을 예쁘게 수놓고 쪄서 칼로 잘라 만든 밀떡을 말한다. 부푼 모양이 풍성하고 먹음직스러워 차려놓고 보면 흐뭇했다. 그날은 부스럼이 많았던 당시 아이들을 데리고 피부병에 좋다는 곳으로 물맞이를 많이 갔다. 流頭(유두)라는 한문을 풀어보면 그대로 흐르는 물에 머리감기가 된다. 어릴 때 냇가 빨래터는 밤이면 공동목욕탕으로 변했다. 물꼬를 보러가던 남자들도 헛기침 몇 번으로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지나갔다. 샘물을 길어다가 뒤꼍에서 끼얹는 것에 비하랴. 그런 맥락에서 유두가 있었음직하다. 이만큼 지나다 보면 어느새 일 년 열두 절기 중 절반이 지나 간다. 한 달에 한 번씩 정성으로 윗목에 상을 차려 놓는 것이 그때는 버겁지 않았다. 당연히 농촌에서 지켜야 할 의무나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비손은 매달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우리어머니들이 살아가는 힘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형효순 /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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