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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권력과 제도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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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권력과 제도 언론
  • 전민일보
  • 승인 2008.11.0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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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언론인들이 러시아의 언론을 당의 선전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비난해 왔다면 다른 한편에서 러시아 언론인들은 미국 언론이 자본가의 지배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편 미국과 러시아의 언론인들이 개발도상국가들의 언론을 두고 유치하고 국수주의적이라고 비난해 왔다면 발전도상국가의 언론인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언론을 식민지배의 도구로 간주해 왔다.
 이처럼 이념(理念)을 달리하는 국가들 간에 있어 온 상대방 국가 언론에 대한 비난은 사실상 언론의 실제적 본질을 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기우월주의의 도취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언론이란 체제를 달리하는 어느 사회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언론이 체제수호의 기능이라는 틀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언론은 지배 권력의 대행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미국 언론은 흔히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객관적인 보도를 통해 모든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기는 방식을 가장 바람직한 언론모형으로 여기고 또 그것을 관행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정치적 중립이란. 지금대선을.앞두고있는.미국언론은.공화, 민주 그 어느 당의 한쪽에 서서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일 뿐, 비정치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 언론은 권력의 부패를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음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파수꾼 역할이라는 것도 실은 따지고 보면 체제(體制) 자체에 대한 감시라기보다는 권력자에 대한 감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언론의 비판기사를 들여다보면 언론이 체제 내의 근원적인 구조적 모순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기보다는 체제 내의 모순은 묵인하면서 정치인, 관료 개개인의 능력이나 부도덕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의 언론 역시 그들 체제와 이념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언론의 본질이기도 하다.
 체제와 이념을 초월하는 언론의 기본법칙은 한 체제 또는 그 국가내부의 언론을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신문, 방송, 잡지와 같은 언론매체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 권력층으로부터 독립적이라거나 자율적이라는 생각은 통념(通念)일 뿐이다. 이러한 통념은 자칫 언론의 현실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신화(神話)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낳게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볼 수 있다. 언론의 보도활동은 구경꾼들에게 피리를 부는 행위로 비유될 수 있다. 그 피리소리가 경쾌한 곡조일 때 관객은 즐거워하고 슬픈 곡조일 때는 관객들도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피리소리가 관객들에게 즐겁게 들리지 않거나 슬프게 들리지 않는다면 피리를 매각하거나 연주자를 교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피리를 매각하는 사람이 언론사의 소유주라면 연주자는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리 연주자가 선택한 곡조가 피리연주자를 고용한 사람의 귀에 거슬리는 것이 되는 경우는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거슬리는 곡을 선택했다면 고용인은 곡조를 바꾸도록 압력을 넣게 될 것이다. 피리연주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는 오늘날 언론인과 언론사 소유주와의 관계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하나의 국가와 그 내부에서 존재하고 있는 언론도 겉보기에는 다양성을 띤 것으로 보이나 실은 소유주나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서 자율성을 확보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흔히 미국 언론은 러시아나 인도네시아의 언론보다는 상당히 많은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율성은 정치적 자율성일 뿐, 경제적 자율성 또는 문화적 자율성까지 고려된 것은 아니다. 언론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나 오도된 신화는 역사적으로도 실증될 수 있다. 17세기 유럽의 초창기 신문은 뉴스를 제공한다는 단순한 서비스 개념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상인(商人)들 간의 상품교환을 위한 정보를 주고받으려는 그들의 필요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신문을 읽을 줄 아는 독자층이 형성된 이후에 신문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신문이 등장하고부터 훨씬 뒤에 가서야 가독층(可讀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상인들에게 있어서 정보(情報)는 곧 힘이기도 했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보를 필요로 하고 또 통제하게 된다.  초창기 신문이 등장하기 훨씬 오래전에도 로마제국의 외지(外地)에 파견되어 있던 권력엘리트들은 노예통신원들을 로마에 상주시켜 놓고 정보를 얻어 내곤 했다고 한다.
 언론이 본질적으로 권력의 매개체 구실을 하는데 불과하다면 이상적인 언론이란 공중(公衆)의 참여를 최대한 보장하는 언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언론다운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보도를 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억압으로부터도 과감하게 벗어나는 것이 현실적인 지혜인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언론인은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애쓰는 것 또한 중요한 사명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허 성 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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