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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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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의 양심
  • 전민일보
  • 승인 2016.01.07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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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양심은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수면 위로 떠올라 송곳 같이 스스로를 찌른다. 살다 보면 세월에 묻혀 잠복된 죄의식이 흐려져 가는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한 가닥 양심을 일깨우곤 한다.

지난 8월 어느 날 경북 청송군 진보면주민센터에 한 통의 등기우편이 도착했다. 현금 50만 원과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권영상 면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70년 전의 실수를 참회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1945년 9월 13일 서울 양정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조동길 소년은 광복을 맞아 휴교 조치로 고향에 가던 중 안동에서 트럭을 갈아타고 청송 진보에 도착했다. 날이 저물어 트럭 운전사와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여관 주인이 해준 저녁밥까지 먹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동길 소년은 밤새 뒤척였다. 먼 귀향길에 지쳐 곤히 잠에 떨어질 나이였는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경상도 시골 아이가 서울의 중학에 유학할 정도면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소년의 수중엔 돈 한 푼이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전반적인 사회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기 전이었다. 어린 마음에 무전숙박은 범죄행위로, 방법은 삼십육계 줄행랑뿐이었다.

여관 주인은 어린 학생의 숙박료를 받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친척 조카 정도로 생각했을 테니까. 소년은 고향집에 돌아가서도 여관집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꾸지람을 들을까 걱정되어 있는 돈을 털어 잘 왔다고 둘러댔다.

그 뒤 상경하여 학업을 계속하였고 격동기의 한국 현대사를 숨 가쁘게 살아왔다. 이제 삶을 정리하는 마당에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과제를 풀어야만 했다. 마음의 짐이 무거워 여관을 찾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도 못 찾았다. 궁리 끝에 면주민센터에 숙박비를 보낸다고 했다. 서울의 특급호텔 하루 숙박비가 50만 원인 것을 참고하여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요양원에 입원 중인 당사자 조교수를 찾았다. 그는 한국국악원장, 한국사학사학회장을 역임한 저명한 학자였다. 아마 내유외강(內柔外剛)의 선비 풍모를 지닌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상에는 4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돈을 떼먹은 조희팔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조 씨는 2008년 다단계 사업으로 2만 5천여 명에게 피해를 입히고 잠적한 희대의 사기꾼이요, 범죄자다. 그 일당들의 범죄행위와 해외 도피 및 수사기관의 뇌물수수 등 파헤칠수록 엄청난 비리가 드러날 것 같지만, 또 어물쩍 넘어갈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진보면 숙박업소를 위해 써달라는 조교수의 요청에 따라 주민센터에서는 양심거울을 만들어 여관 업소에 나누어주고 생필품을 구입하여 분배해주었다.

조교수는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를 짓눌러왔던 짐을 벗었다. 그리되니 건강도 좋아졌을 것이다.

나라고 그런 일이 왜 없었을까. 그냥 덮어버리고 잊은 것뿐이지.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다른 방식으로라도 갚아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김현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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