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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어느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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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어느 기억
  • 전민일보
  • 승인 2015.07.0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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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칼럼니스트

 
조선 사대부들은 그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칭했다. 당대 지식인 사회의 충격과 반향이 담긴 말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중종(中宗)이 기획한 드라마다. 왕은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역사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묘호 자체도 우유부단함과 무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조광조(趙光祖)를 제거한 주역으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실제로는 왕의 의도와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 인물이 남곤(南袞)이다. 그가 죽던 날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했다.

“남곤은 문장이 대단하고 필법(筆法) 또한 아름다웠다.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서 지론(持論)이 올바른 것 같았다. 임종(臨終)할 때 평생 동안의 초고(草稿)를 모두 불사르고, 이어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했고, 또 ‘내가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하지 말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諡號)를 청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했다.”

JP가 했던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라는 말의 원조인 셈이다. 사관이 증언하는 남곤의 삶은 스스로 고백한 정치적 과오를 제외하면 부끄럽지 않은 날들이었다. 적어도 남곤만큼 자신의 삶을 성찰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남은 사람들은 떠난 자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남곤과 JP의 메시지를 복기해보자.

남곤과 JP 모두 자신의 삶을 허무하다 고백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고민해야 할 것은 허무함 그 자체가 아니라 과연 삶을 어떠한 고민과 열정으로 살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무죄를 주장하던 빠삐용(Papillon)은 심판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자신의 죄를 수궁한다. “인간으로서 가장 큰 죄, 바로 인생을 낭비한 죄 때문이다.”

내 삶의 어느 기억 한 편이다. 대학 선배와 서울 한 지하철역에 갔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이 역사(驛舍) 내가 지었어.” 그의 말 속엔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당을 받고 막노동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했던 역할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했던 다음 말에서 더 확실해졌다.

“난 일당 7만원 받으면 10만원 그 이상 값어치만큼 일 해. 그래야 내게 돈 주는 사람도 남을 거 아냐.”내게도 같은 상황이 왔다. 새벽 일찍 나서 배당받은 일자리로 향했다. 물류창고에서 물건을 받아 납품하는 일이었다. 기사를 따라 나섰다. 어설픈 내 일 솜씨가 맘에 들지 않았던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모욕과 윽박 이었다. ‘그래 내가 받는 일당에 욕먹는 것도 포함된 것이니 어쩌랴’

그런데 내가 얼굴이 화끈했던 일은 따로 있다. 미사리에 위치한 중급규모의 매장에 갔을 때였다. 여느 경우처럼 업체 책임자가 나와서 물건 적재할 곳을 얘기해줬다. 그가 말한 곳은 계단을 올라 낮은 천장을 한참 지나 위치한 좁은 곳이었다. 몇 번 오르내리는데 숨이 턱에 찼다.

그런데, 갑자기 업체 책임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뭐 하다 오셨어요. 내가 보니 이런 일 할 분이 아닌데.. 사람은 다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어요. 본인에게 맞는 일을 하세요.”

그는 더 이상 말없이 내 일을 도왔다. 그는 나를 모욕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의 선의를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나였다. ‘일당만큼도 일을 못하고 있구나’

나는 글을 쓰는 것 말고 생업으로 하는 일에 감사한 마음이다. 두려운 것은 예전 기억 한편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이다.

허업(虛業)이 아니었다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빠삐용을 절망케 한 추궁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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