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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손정도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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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손정도선생
  • 이종근
  • 승인 2007.04.03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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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8돌을 맞아 임시의정원 의장 역임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 독립과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81.7.26-1931.2.19)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8돌을 맞이하여 임시의정원 의장과 임시정부 교통총장,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지낸 손정도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 

 선생은 1881년 평안북도 강서군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해석(海石), 자는 호건(浩乾)이다. 선생은 유가(儒家) 집안이자 강서지방의 명문가로,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895년 박신일과 결혼했다. 

 선생은 1903년 숭실학교에 입학해 수학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직을 맡는 한편 이승훈이 세운 영창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다시 서울로 유학길을 떠나 협성신학당에 입학, 목회자 교육을 이수했다. 

 북만주를 비롯한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 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독립 운동 근거지 확보와 독립 자금 마련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같은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 관헌은 선생을 체포했다. 

 일본영사관에서 고문을 받던 선생은 3개월 후에 가쯔라 암살미수죄와 105인사건 연루자로 지목되어 경성으로 압송됐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으나, 몇일 후 독립군무관학교에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금광을 습격했다는 이유로 다시 피체됐다. 

 일제는 결국 선생을 북간도에서 추방시키기 위해 진도로 유배를 보냈다. 하지만 선생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 오히려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후 신한청년당을 포함, 파리 강화회의 밀사파견에 적극 참여했다. 

 상해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의정원 의장을 포함, 교통총장을 역임하게 된다. 또 1919년 박은식과 함께 대한교육회를 조직하는 한편 1922년에는 대한적십자회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용단 설립에도 앞장섰다.

 선생은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도 정의부와 고려혁명당 사업에 협력하는 등 독립 운동에 온갖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의 만주침략 야욕이 본격화 되면서 일제는 독립운동지사들을 체포 구금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해석이 그 동안 일구어 놓은 농업합작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농민운동, 선교 사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험에 처했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과 맞서 싸울 방도를 강구하던 중 1931년 2월 19일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활동 자료와 사진을 4월 한 달 동안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는 선생에 대한 공훈선양 학술 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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