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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和而不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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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和而不同)
  • 전민일보
  • 승인 2023.09.2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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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비공(批林批孔)은 홍위병들에게 모든 것을 파괴하고 처단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임표(林彪)는 모택동이 처단해야 할 정적이었다지만 공자는 거기에 왜 들어갔을까?

아이러니하지만 만세사표라는 공자를 근원적으로 부정한 이 부분이 문화혁명(文化革命)의 광포(狂暴)한 행동에 면책근거가 되기도 한다. 봉건적 계급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공고화한 원흉(?)이 공자인 때문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핵심은 다른 것을 존중하고 화합하되 타인에게 맹목적으로 동화하지 않는 바를 의미한다. 여기에도 칼을 들이댄다면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고 계급적 질서를 전제로 한 공자의 반동적 사상이 숨겨져 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플라톤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과 닮았다.

공자와 플라톤에 대한 비판이 문제될 것은 없다. 사문난적(斯文亂賊)과 같은 입막음을 통해 그들을 옹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그들이 성현(聖賢)이기에 더욱 성역이 되어선 안 된다. 그들에 대한 해석은 앞으로도 더욱 다양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E. H. CARR)의 말 그대로다.

화이부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지만 내가 그 말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바는 반동(反動) 공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네가 얘기하는 화이부동은 인간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하는 섬뜩한 것이다’라고 비판한다면 거기엔 동의할 수 없다. 그의 견해가 잘못 되어서가 아니고 나는 그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화이부동의 모습이기도 하다.

처음 한국사의 모습을 보고 이런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까?’ 상복(喪服) 문제를 가지고 정권의 정통성 논쟁을 벌이는 것, 화이론에 근거한 외교정책과 그로인한 전화(戰禍) 그 중에서도 불구대천의 적대적 당파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젠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앞의 그 모습들이 오늘 우리에게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 화이론 그리고 당파성까지 버전만 바뀌었을 뿐이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이 보수와 진보라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양상은 조선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당파가 다르면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혼인도 하지 않았던 조선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그것이 나만의 오판이라면 다행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의 모습은 분단상황과 오버랩된다. 그것은 원인이자 결과이고 과거이자 현재이면서 미래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하는 요소다. ‘윤치호 일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 오래된 미래를 확인할 수 있어서다.

‘윤치호 일기’를 건조하게 살펴보면 1930~40년 당시 이미 분단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윤치호는 손병희나 홍난파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지만 절친했던 이상재와 안창호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영웅이 아닌 약점 있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다. 윤치호가 일기장에 그린 분열조짐의 결말은 그가 예견하지 않았던 것이겠지만 후일 현실이 되었다. 분단모순을 해소하기 어려운 것의 근원도 바로 우리의 모습 속에 있다.

적잖은 경우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차이가 사람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것이 꼭 비판받을 바는 아니다. 나와 같은 인식 토대를 가진 사람과 더 살가운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운명이다. 토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사이에 유효한 해결방식이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설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진리는 의견과 의견 사이에 있다는 밀(J. S.MILL)의 말처럼 그 어떤 진영 논리도 완벽하게 선이 될 수는 없다.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침묵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같지만 결코 화합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화이부동(和而不同) 대신 동이불화(同而不和)가 넘쳐나는 사회의 건강성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장상록 칼럼리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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