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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는 왜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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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는 왜 만들어졌나
  • 전민일보
  • 승인 2009.01.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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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대찰로 무왕(武王, 600년-641년)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절터의 마로 뒤쪽에는 미륵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좌우로는 미륵산에서 뻗어내린 구릉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 30대 왕인 무왕 때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 창건됐다.
 백제가 망한 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 무렵 새로 만들어진 당간지주로 보아 그 후에도 계속해서 큰 사찰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미륵사가 창건된 사상적 배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동북아시아 일대에 크게 융성하고 있던 미륵사상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기는 내적으로는 백제를 비롯한 고구려, 신라의 삼국이 모두 미륵신앙을 크게 숭상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미륵신앙 융성의 시대적 배경에서 미륵사가 창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시대의 미륵사가 익산지역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백제시대의 대가람(大伽藍)의 경영은 공주, 부여 등의 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수도권 이외에도 서산지방과 예산지방에 백제시대의 불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이들 유적은 규모가 큰 것이 아니라 기도처 혹은 수도처로서의 소규모 가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익산지방의 미륵사는 동양 최대의 석탑을 자랑하는 거대한 가람을 조영하고 있다는 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익산지방에 그처럼 거대한 가람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익산지방을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삼으려한 어떤 의지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미륵사지는 그동안의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절의 구조)배치가 확인됐다. 중심 가람인 중문터(中門址)와 탑터(塔址), 강당터(講堂址), 회랑터([回廊址) 등이 조사됐다.
 이 조사로 밝혀진 절의 구조는 중심 절은 동원과 서원으로 나누고, 각각의 원(院) 안에 독립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을 배치한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 가람으로 중원의 거대한 강당 하나만을 두어 동원과 서원에서 공동으로 사용토록 했다.
 백제의 가람 배치는 대체로 중문, 탑, 금당 및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일탑식 가람이며, 중문에서 강당 좌우 또는 강당 좌우에 있는 독립 건물 바깥 전면에 회랑을 설치하여 연결시키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결국 미륵사지는 가람배치는 백제 가람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독특하게 구성된 특이한 가람인 셈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된 “...三所創...”(세 곳에 만들었다는 뜻)과 일치하며, 연못을 매립한 뒤 절을 조성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緣起說話)는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전하고 있다. 우선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장)이다.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신라진평왕의 공주 선화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서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쳐 주며 부르게 하였다.
 이 동요가 궁중에까지 알려지자 결국 선화공주(善花公主)는 왕후가 준 황금 한말을 노자로 하여 귀양을 가게 된다. 이 때 서동은 선화공주를 취하여 백제로 돌아온다. 선화가 모후가 준 황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하자 그때야 서동은 황금이 보배임을 깨닫게 되고, 마를 캐던 곳에 흙더미 같이 쌓여 있던 금을 사자사(師子寺)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력(神力)을 빌어 신라 왕실에 보내게 된다.
 이후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오른 후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했다. 이에 부인은 못을 메우고 여기에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므로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곳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전, 탑, 낭무)를 세곳에 두고 미륵사라 하였는데 진평왕도 백공(百工)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이 무왕조의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는 신이적인 내용을 많이 지닌 설화체의 기사이다. 이는‘삼국유사’가 지니는 신이적인 내용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 미륵사 창건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서동의 모가 지룡과 통교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하는 기록이다. 이는 인간 세상에 있어서 가상의 동물과 정을 통한다고 하는 점은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다.
 어떻든 이러한 신이적인 기록은 건국설화 또는 시조설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 서동이 용의 아들이라고 하는 점도 무왕에 대한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탁된 기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의 용신앙과 관련하여 해석하면 보다 합리적이다. 고대 한국 사회에서는 일찍이 백제나 신라 등에서 용신앙이 성행했다.
 초창기의 용신앙은 한국 고유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수신의 화신으로서 왕권의 존엄성을 높이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에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설하고 지룡에 대한 기사를 남기고 있는데, 시두말성의 가까이에는 못이 있고 그 못에는 용왕이 살고 있어 밤마다 미우(微雨)를 내리게하 여 길바닥에는 먼지가 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익산지역에는 고유의 용신앙이 있어 왔는데 이 용신앙을 바탕으로 마한의 중심지 익산에 무왕이 진출하고자 미륵하생신앙을 전개시켜 나간 것이며, 이로 인해 신앙의 유포 및 전개,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무왕의 어머니가 지룡과 통교하여 무왕을 낳았고, 그 지룡이 살던 곳이 바로 마룡지가 있는 익산지역이기 때문에 이같은 무왕출생설화의 구조적 의미는 무왕이 익산지역을 용신앙을 통해 지배세력을 병합하였다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은 미륵삼회의 전, 탑, 낭무를 세 곳에 두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는 경전을 통해 보면 도솔천에 있는 미륵은 하생하여 용화보리수 아래에서 인연있는 사람에게 세 번에 걸친 설법을 통해 구원한다고 한다. 초회의 설법에서 96억의 중생을, 재회의 설법에서 94억, 삼회의 설법에서 92억의 중생을 구한다고 하고 있다.
 용화산 아래에 미륵삼회의 전, 탑, 낭무를 세곳에 두었다고 함은 용화산은 곧 미륵이 설법처로서의 용화보리수를 상징하고 있고, 세 곳에 두었다고 함은 삼회의 설법을 상징한다. 곧 이는 미륵이 하생해서 삼회의 설법을 한다는 용화세상의 세계를 가람으로 구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곧 익산은 미륵이 하생할 인연을 갖고 있는 땅이었고, 이곳에 미륵이 출현하여, 삼회설법을 상징하는 미륵사의 창건을 통해 미륵불국토사상을 살필 수 있다.

 미륵사의 창건 주체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무왕의 다른 왕후

 그런데 설화 안에 머물렀던 백제 불교의 베일이 벗겨졌다. 익산 미륵사의 창건 주체는 그동안 알려졌던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무왕의 다른 왕후’로 확인됐다. 미륵사의 창건 연대도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19일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터 석탑 해체 보수 현장에서 “석탑 1층 심주(心柱, 중심 기둥)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 사리장엄을 안치하는 공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백제 무왕의 왕후가 조성한 금제 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담은 병)와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사리장엄구 조성 내력을 담은 금판) 등 최상위 국보급 유물 등 500여점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김소장은 “사리봉안기를 해독한 결과 정확한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시대(600~641년)의 기해년(己亥年)인 서기 639년으로 확인됐고, 창건 주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왕비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하고 주칠(朱漆)로 쓴 사리봉안기에서는 그동안 설화로만 전해 오던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와 내력이 기록돼 주목된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를 적었다.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백제 왕후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됐다. ‘삼국유사’ 등에서는 미륵사를 무왕과 그 아내인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善花)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전했는데, 이번 사리봉안기에서는 미륵사를 건립한 무왕의 왕후를 선화가 아닌 당시 백제 최고 관직이었던 좌평의 딸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동요를 지어 퍼뜨려 신라 선화 공주와 결혼했다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의 일화는 허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삼국유사’가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고 기록해 놓은 것과 달리, 백제의 좌평(고위급 관직) 사택덕적의 딸 출신인 백제인 왕비가 건립을 발원했다는 내용이 판독된 것이다. 무왕 때 왕비의 발원으로 절이 지어진 것은 맞으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번의 사리 기록 발견은 구체적인 창건 연대(639년)는 물론, 백제시대 왕비에 대한 유일한 명문 기록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삼국유사’ 기록의 설화성 때문에 미륵사지의 구체적인 창건 연대에 대해 그동안 6세기의 무령왕대설, 동성왕대설, 그리고 7세기의 무왕대설 등이 엇갈려 왔으나, 이번 발견으로 논란이 일단락된 셈이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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