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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岳飛)와 진회(秦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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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岳飛)와 진회(秦檜)
  • 전민일보
  • 승인 2022.01.2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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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북> 저자로 유명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은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는 백인의 숭고한 의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생각이 갑자기 나온 것일까.

그 이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을 비롯한 많은 서구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문명에 대한 비판과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인식은 이후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까지 이어진다. 그가 말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모든 인류사를 보편적 궤도의 범주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의 제국주의적 시각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한 편으로 돌아볼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제국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데 있다. 동아시아가 여전히 불안정한 근본적 이유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한족(漢族)이 주인인 국가지만 표면적으로는 다민족 국가를 표방한다.

그런 점에서 동북공정을 비롯한 각종 역사왜곡은 한 편 이해할 수 있다. 분열시대는 논외로 할지라도 원(元)과 청(淸)을 중국사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 이전 그 어떤 한(漢)왕조도 만주에 대한 완전하고 배타적 지배권을 가진 적이 없다. 그것을 실현한 것은 몽고족이 세운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통일 왕조인 원이나 청과는 달리 분열기의 역사해석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족이 세운 송(宋)과 만주족이 세운 금(金)의 관계다.

1126년 발생한 이른바 정강의 변(靖康之變)은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혼란을 안겨준다. 당시 금태종(太宗)은 송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부자를 비롯한 수 천 명을 포로로 잡아간다.

후일 청 태종(太宗)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와 비교해도 그 잔혹함이 말로 다할 수 없다.

금이 송에게 한 것에 비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이 조선에 요구한 것은 자비롭게 느껴질 정도다.

금 태종은 포로가 된 송 휘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 아들인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라는 칭호를 붙여 모욕한다. 더불어 황비를 비롯한 수많은 고관대작 부인들이 금나라 신료의 첩으로 전락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등장한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악비(岳飛)와 진회(秦檜)다.

한족의 악비에 대한 추모는 한국인이 충무공 이순신을 숭모하는 것에 못지않다. 반면에 그를 죽인 진회는 만고의 죄인으로 남아있다. 진회의 이름은 작명에서 조차 금기시 될 정도다.

문제는 만주족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중국이 진정 다민족 국가라면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악비가 명장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 악비는 금나라가 두려워한 맹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충무공을 두려워했던 일본군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금나라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았다고 한다.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

또한 악비는 “얼어 죽더라도 민가를 훼손하지 말라. 굶어 죽더라도 약탈하지 말라.”는 규율을 실천함으로서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명 말기 원숭환(袁崇煥)이 그랬듯 악비는 송 왕조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이때 금은 ‘악비의 목’을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한다.

결국 진회와 송 고종(高宗)의 공모에 의해 악비는 반역죄로 처형된다.

원숭환이 명 황제에게 능지처참을 당한 것과 유사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원숭환 처형 후 멸망한 명과는 달리 악비를 희생시킨 송은 평화를 얻는다. 아이러니 한 것은 송은 진회의 화친책을 통해 이후 150여 년간 존속했을 뿐 아니라 송을 유린했던 금나라의 멸망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회에 대한 다른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여기서 떠올리는 인물이 김부식(金富軾)이다. 김부식은 당시 송나라에서 벌어진 참상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금과 화친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다.

현 중국 정부의 악비에 대한 평가는 ‘민족의 영웅’에서 ‘충성스런 군인’으로 바뀌었다. 동북공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변하지 않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끊임없이 변한다. 한국사라고 예외일 수 없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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