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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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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 사이에서
  • 전민일보
  • 승인 2016.05.10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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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이 흐드러지는 오후다. 선선하고 약간은 탁하기도 한 바람결에 어쩐지 책 냄새가 그립다.

이런 날에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서재의 새 책 냄새보다는 오히려 오래 묵은 낡은 책냄새가 어울리기 마련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헌 책방에 가서 숨어 있는 보물이라도 찾는 듯 오래된 책들을 뒤적거리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그 헌 책방마저도 찾기 힘들다. 최신 노래와 유흥만이 넘쳐나는 시내 거리에는 이제 서점도 헌 책방도 없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런 바람 좋은 날에는 산책 삼아 옛 헌책방 거리를 서성이게 된다.

이제는 그 거리에 없는 오래되고 손때 묻은 책들의 퀴퀴하면서도 눅진한 냄새가 더욱 그립기만 하다.

그래서 요즈음엔 도서관에 자주 산책을 나간다.

헌 책방 거리를 지나 걷다 보면 십 수 년도 더 되는 허름한 도서관이 나온다.

새로 지어진 다른 도서관에 비해 책이 많은 한편 사람이 적어 한적한 오후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인 곳이다.

찬찬히 책을 둘러보고 있으면 오래전 감동을 받아 여러 번 읽었던 책을 만나 반갑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만나 설레기도 한다.

책의 제목도 작가도 생소하지만 왠지 제목에 끌려 선 자리에서 몇 십 페이지를 넘겨보다 한나절 시간을 보내기도 일쑤다.

수많은 책 더미에 둘러싸여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좋다. 그래서 집에도 작게나마 서재를 만들어 서고 흉내를 내고 있긴 하지만, 도서관이나 헌 책방이 주는 그 느낌을 집에서 재현하기는 어렵다.

몇 십 년, 십 년, 그리고 아직 채 일 년도 안 된 책들이 서로 내뿜는 종이 냄새가 섞이고 손때 묻는 책들이 가지는 연륜의 향기가 가득한 공간에서의 숨쉼에는 어쩐지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책들이라도 도서관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한 번 더 꺼내 읽게 되는 것이다.

사실 헌 책 예찬을 잔뜩 해댔지만, 내가 도서관에서 읽는 책이 거창한 고서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프루스트나 타고르의 고전을 좋아해 여러 차례 읽어 오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 오랜 책은 내가 예전에 읽은 책이라는 표현에 좀 더 가깝다.

책을 사랑하는 방법이 더 적극적이던 젊은 시절 몹시도 치열하게 읽었던 책을 지금 다시 읽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밤을 새워 읽었던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억과 감동이 들쭉날쭉 희미하기도 하고 여러 책이 섞여 뭉뚱그려져 있기도 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기억의 공백이 생기고 공백은 추억과 만나 과대해 지기도 과소해 지기도 되기 마련이다.

다시 책을 읽으며 그 변형된 기억의 퍼즐을 찾아 맞추는 느낌에 특히 책읽기가 즐거운 요즈음이다.

한적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날씨가 특별히 좋은 날에는 도서관 앞 벤치나 정자에 앉아 그 예전의 소중한 책들을 다시 읽는다.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 문학도, 삼십대의 나이에 시에 빠져들게 했던 기형도의 시집도 다시 읽는 지루함이라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예전에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에 대해 새로운 공감이 있기도 하고, 괜히 몰입되어 응원하게 되는 캐릭터 자체가 아예 바뀌는 일도 있다.

빠르게 읽어 내려 버리려던 습관도 치기어린 성격과 함께 누그러졌는지, 예전 나를 흔들었던 보석 같은 문장을 만나면 두 번 세 번 눈을 감아가며 충분히 곰씹어 읽는 여유도 이제야 즐기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표현이 있으면 메모지에 적어보기도 하고, 누군가가 밑줄을 그어놓은 구절을 만나면 나도 다시 한 번 되읽어 보기도 하다 보니 들고 나온 책들을 다 읽지 못하는 날도 많다.

어스름해질 때쯤이면 반납을 마친 책을 서고에 정리하며 늘 생각한다.

아, 책 냄새가 참 좋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케케묵은 서가의 낡은 책과 같은 향기로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직 석유 향기가 가시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아닌, 앞부분만 까맣게 헤어지고 뒷장은 누구도 들춰보지 않은 시시한 책도 말고. 여러 사람의 손때도 묻어 있고, 양장본이지만 들고 다니며 읽느라 귀퉁이가 조금 헐기도 하고, 결말이 궁금해 맨끝장까지 다 읽느라 끝까지 균일하게 헤어진 헌 책과 같은 향기로 말이다.

깨끗하게 보고 잘 꽂아둔 서가의 전시용 책보다, 한 두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라도 만난 듯 형광펜이라 줄도 그어두고, 어떤 사람은 가을 날 벤치에서 읽다가 기분이 좋아져 코스모스 꽃갈피라도 하나 끼워둔, 내가 그런 낡은 책 같은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꽃바람 부는 오늘도 운동화 신고 도서관에 간다. 오늘 내가 읽는 책 냄새가 내 몸에 배었으면 하고.

김한수 전 삼천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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