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학회에 연회비를 보내려고 현금지급기에 통장을 넣었는데 갑자기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속에 있는 숫자를 다 꺼내 이리저리 조합했지만 끝내 송금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기야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오래 전에 잊어 먹고 인터넷에서 물건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하며 살고 있을 정도이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고 보니 하루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할 일이 꽤 많다. 우선 컴퓨터를 켜면 비밀번호를 여러 번 입력해야 한다. 우선 이메일 함을 열 때와 페이스 북, 학교 홈페이지 웹 메일과 교직원 서비스에 접속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강의를 마치고 퇴근하려고 연구실을 나서다 이 모 교수님 연구실 앞에 택배 기사가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교수님께서 퇴근하셨으면 내 연구실에 물건을 대신 받아 보관하려고 용건을 물었더니 열쇠를 수리하러 왔다고 했다. 택배 기사가 아니라 열쇠 수리공이었다.
잠시 후 교수님께서 오셔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자동 열쇠가 고장이 났다는 것이었다. 열쇠수리공 이야기인즉 10년 이상이 되어 오작동이 일어나므로 교체하는 게 낫다고 했다.
옆에서 열쇠 교체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엉겁결에 내 연구실에 자동 열쇠를 설치하고 말았다. 그래서 또 비밀번호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비밀번호는 은행에서 통장이나 신용 카드를 이용하거나 컴퓨터 통신망에 접속할 때 자신이 사용하는 정보에 대해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미리 정해 두는 고유한 문자열을 일컫는다. 최근 아이핀 시스템 해킹사건이 일어난 이후 공공 아이핀 탈퇴가 급증하였다.
8일 행정자치부는 공공아이핀시스템 공격 사실을 공개한 지난 5일부터 6일 오후 6시까지 1008명이 탈퇴했다고 하였다. 이는 평소 하루 탈퇴 인원이 수십 명 수준으로 많아도 100명을 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탈퇴자가 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처럼 탈퇴자가 급증한 것은 시스템이 해킹 당한 후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이 쓰는 비밀번호를 자주 바꾸고 있으며 관계 당국에서도 이를 권장하고 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실시한 후 사후관리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국민체력센터 검진의료부에서는 검진결과 이후 사후관리를 통해 맞춤 식사요법을 제공하는 ‘내 비만계좌의 비밀번호’라는 이름으로 특강을 하였다.
비만을 일으킨 원인을 밝혀 치료를 효과적으로 하려는 취지로 실시한 것이다.
이것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푸는 실마리를 비밀번호에 빗대 나타낸 사례이다. 어떤 대상과 소통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듯이 문제를 일으킨 실체에 대한 비밀을 파악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동안 내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의 문에 대한 비밀번호 잊고 살았다.
그래서 내면 깊숙이 들어가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큰 소리로 문만 두드리며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다. 오늘 대학원생이 내 페이스 북이 해킹당한 것 같다며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문자를 줬다.
그동안 이런저런 비밀번호의 홍수에 떠밀려 너무 정신없이 살아왔다.
이제 내 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잘 설정하고 기억하여 스스로를 절실하게 들여다봐야겠다. 이 땅에서 발 딛고 사는 동안 뭇사람들한테 공연히 손가락질 당하고, 헤프게 입방아에 오르는 일 없도록 문단속 잘하며 살아야겠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채 땅을 적시지 못하고 풀잎 갈증만 더 부추기고 그쳤다. 육순이 문턱에 걸려 비 그친 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