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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존재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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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존재와 기억
  • 전민일보
  • 승인 2015.04.0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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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칼럼니스트

 
대학시절 읽은 [하멜표류기]에서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하나는 그가 기록한 여정 속에 내 고향 금구가 나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의 대응에 대한 그의 기록과 평가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있지 않았지만 전언 등을 통해 외세의 침략 앞에서 조선인이 한 없이 나약하고 비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알고 있던 상식이 배제된 건조한 통계 한 토막을 살펴보자.

임진왜란 당시 총검으로 일본군에 항거한 인구 비율이 3.5%, 경술국치 전후 항일참전율은 1.1%정도라고 한다. 당혹스럽지만, 세계 역사상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한민족(韓民族)만큼 침묵을 지킨 사례는 거의 없다. 우리는 하멜이 조선에 대해 악의적이었다거나 일본에 대한 무력항전 비율에 대해 달리 설명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석은 다르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부정적 시각과 납득하기 어려운 통계의 함정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여기 한국을 바라보는 또 다른 하나의 시각이 있다. “한국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다(It’s a miracle that South Korea still exists).”

오래 전, 전 세계 여행객 사이에 상당히 유명한 ‘론리 플래닛사’웹사이트에 소개된 한국에 대한 설명 중 일부이다. 그들은 왜 한국의 생존을 기적이라 얘기했을까. 세계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한국과 비교되는 여러 나라가 있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존재하는 폴란드가 그렇고,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중국까지 상대해야 했던 베트남도 있다. 하지만 폴란드도 베트남도 한국에 비하면 훨씬 좋은 여건에 있다.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까지 가히 세계 초강대국과 상대해야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한국의 자존은 외부의 눈에 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위에 언급된 기사가 결코 한국을 폄하하거나 모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국이 얼마나 강인하고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자존심 강한 한국인 입장에서는 중국이나 일본과 대등하게 취급받지 못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전 세계를 호령한다는 유태인도 2천년의 이산(Diaspora)과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그리고 히틀러가 점령한 영토의 합보다 넓은 정복지를 가졌던 징기스칸의 후예는 지금 어떤가. 우리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만주족은 또 어디에 있는가.

한무제(漢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켰음에도 우리는 중국인이 되지 않았다. 거란, 몽고는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경술국치까지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결코 말살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한국은 그런 점에서 강자의 조건을 완벽하게 가진 민족이다. 미래에 그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한국은 그것을 극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근거이다.

이제 처음의 문제로 돌아와보자. 우리는 여전히 하멜의 기록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에서 패한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 약소민족이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유지한 사례는 거의 없다. 여기서도 우리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화두는 조선왕조의 멸망이 아니다.

나는 하멜이 보지 못했던 수많은 무명용사의 용기와 희생 그리고 통계에 보이지 않는 의로운 지사들의 피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린 경술국치 당일 조선의 평온함에 대해 깊이 되돌아봐야 한다. 하멜의 얘기도.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한 사람이 간절하게 호소한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너무 가려워요.” 버클리(George Berkeley)는 이렇게 설명한다. “에세 에스트 페르키피(esse est percipi)”존재하지 않는 다리에서 발가락이 느끼는 가려움증은 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재’한다는 것이다. 하멜의 얘기도, 경술국치의 기억도 우리에게 지각되는 한 영원히 실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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