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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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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야 고맙다
  • 전민일보
  • 승인 2010.02.03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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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나가려고 아파트 정문을 나서는데 내 앞에 80대 노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한 발을 옮기니 10cm쯤 떼어졌다. 횡단보도에서 초록색 신호가 들어오자 길을 건너는데 종종걸음으로 걷다 보니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건널 수가 없었다. 답답하여 그냥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노인은 온갖 힘을 다하여 걷고 있었다. 마음은 뛰어가고 싶겠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우리 아파트에 사는 60세에 가까운 아주머니 한 사람은 뇌졸중에 걸려 한 쪽 다리를 못 썼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도 아주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도 몇 년 동안 걷기를 계속하더니 점점 나아져 이제 제법 잘 걷는다. 또 어떤 이는 보조 기구를 밀며 넘어지지 않고 걸어 다니기도 한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싶어 안타까웠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잘 걸을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초등학교는 2km정도 되지만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녔다. 이리동중학교 1학년 때는 16km 되는 익산까지 걸어 다녀야 했다. 다행히 2학년 때부터 기차가 다녀 걷는 거리는 줄었지만 8km는 걸어야 춘포역에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전주사범학교에 다닐 때도 같은 거리를 걸어서 기차 통학을 했다. 아침밥이 늦어 기차를 놓칠 염려가 있으면 집에서부터 뛰었다. 그러기에 한 번도 기차를 놓친 일이 없었다. 그 무렵의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비만 오면 진흙탕 길이었다. 가로등은 생각하지도 못했으며 달빛마저 없으면 어두운 밤길에 흙탕에 빠지거나 미끄러지기도 했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어려운 길을 걸어야했다.
 교직에 있으면서도 집에서 2km쯤 되는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같은 마을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걸었다. 도시락을 들고 가면 저희들이 들어다 준다고도 했다. 별로 힘드는지 모르고 다녔다. 가정 방문을 하거나 가까운 거리에 출장을 갈 때도 대부분 걷는 것이 보통이었다. 몇 년 걷다가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다. 걷는 것보다 훨씬 편해서 좋았다. 지금이야 누구나 승용차가 있어 타고 다니지만 1960년대는 자가용이 있는 집은 구경할 수도 없었다.
 걷기에 이골이 나서 그러는지 산도 잘 오르는 편이다. 튼튼한 다리 덕에 백두대간도 종주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덕유산, 속리산, 조령산,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을 거쳐 향로봉까지 걸었다. 계속 걸어 간 것은 아니고 구간 구간을 이어가서 38회째에 마쳤다. 한겨울은 쉬고 한 달에 2회씩 2년 정도 걸렸다. 북한 땅이 아니라면 백두산까지 갈 수 있었지만 민통선 안에 있는 향로봉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제일 힘들었던 구간은 속리산 아래 밤티재에서 시작하여 696봉과 청화산, 조항산, 대야산 등 4봉을 하루에 올라야 할 때였다. 대야산 아래에서 쉬는데 도저히 걸어갈 힘이 없어 나는 못 가겠다고 바위에 누워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대장이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하여 한 발 한 발 옮겨 대야산에 올랐었다. 11시간 15분만에 불란치재에 도착했었다. 제일 오래 걸은 것은 설악산 지역을 갔을 때였다. 새벽 3시 15분에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르기 시작했다. 소청봉, 중청봉, 대청봉, 희운각, 공룡능선, 마등령, 저항령, 황철봉을 거쳐 미시령까지 걸었다. 하루 종일 걸어 미시령에 도착하니 날이 어둑어둑했다. 시계를 보니 18시 45분이었다. 15시간 30분을 걸은 것이다.
 다음에는 장수 장안산 옆의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수분재, 팔공산, 마이산, 만덕산, 슬치재, 경각산, 오봉산, 구절재, 내장산, 추월산, 강천산, 무등산, 가지산, 제암산, 존재산, 조계산을 거쳐 광양 백운산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을 종주했다. 이어 모래재 옆의 주화산에서 시작하여 운장산, 인대봉, 대둔산, 천호산, 계룡산을 거쳐 부여 낙화암까지의 금남정맥도 종주했다. 그 밖의 우리나라의 400개 산도 올랐다. 이처럼 우리나라 등줄기 산을 종주하게 된 것은 내 튼튼한 다리 덕이다. 다리가 부실했다면 언감생심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다리가 고마울 따름이다.
 너무 혹사한 탓에 오른쪽 무릎이 조금 아파 진찰을 해보니 연골이 많이 닳았다하여 글루코사민을 먹고 있다. 약은 미국에 자주 가는 사위가 사다 주어 고맙다. 닭발을 사다 녹두를 넣고 달여 먹으면 좋다하여 가끔 해 먹는다. 주위 근육을 단련해야 계속 걸을 수 있다하여 의자에 앉아 발끝을 힘줘 올리는 운동을 계속하니 아직 걷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어 다행이다. 지금도 몇 시간 걸리는 전주 근교의 산은 주당 세 번쯤 오르는 편이다.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보면 어디서나 많이 걸으라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단다. 동의보감에도 약보(藥補)보다는 식보요, 식보보다는 행보라 했다. 70대가 되면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라는데 움직이기 싫어하고 집에만 가만히 있다가는 갈 곳은 한 군데뿐이다. 곧게 서서 걸을 수 있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고 많이 걷고 즐겁게 살아야겠다. 다리야, 정말 고맙다. 

김길남 /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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