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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견디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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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견디는 용기
  • 전민일보
  • 승인 2019.08.2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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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는 서울도, 개성도, 평양도 버리고 의주에까지 이른다. 그것이 분명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의 안위는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틈만 나면 명나라로 들어가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의 국왕이 아닌 명나라 황제의 신민이 되려했다. 전쟁을 초래한 궁극적인 책임에 앞서 그는 최소한의 국왕된 도리도 잊은 것이다.

그나마 선조(宣祖)가 국왕으로서 잘 한 것을 찾자면 이순신(李舜臣)을 등용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순신의 등장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당대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파격을 넘어 인사전횡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1년 전인 1591년이다. 그 바로 직전 이순신의 관직은 정읍 현감이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 좌수사가 된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위관이나 초급 영관급 장교가 함대 사령관이 된 셈이다. 너무도 당연히 사간원에서 문제제기를 한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이에 대해 왕은 이렇게 답한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당시 왕을 비롯한 조정신료들이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선조가 비판을 감수하고 필요한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감수하면서 나아갈 바를 향해 전진하는 용기와 실천력이다.

그렇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비겁한 타협이야말로 최악의 리더쉽이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보여준 하나의 용기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란 중임에도 틈만 나면 공인(工人)들을 모아 놓고 부채 따위를 만들어 고위관료들에게 선물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명에 뜻을 둔 자에게는 부귀가 족히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 천 번 생각하여 일을 시행할 방침이 완전히 갖추어져야 나아가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소인들에게 저해를 받아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포부를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당시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한가하게 공인을 불러 선물이나 만들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다.” 사람들의 의구심에 찬 눈초리를 충무공은 몰랐을까.

선조는 수군을 육군에 통합시키려 했고 조정의 중요한 정책결정은 고위 문신들의 몫이었다. 이순신에게 두려웠던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 수군을 해체할 수 도 있는 국왕과 정책담당자들이었다.

이익은 이 장면에서 보여 준 충무공의 행위에 대해 ‘천고에까지 지사들의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병란의 창졸한 사이를 당하여 공과 허물이 당장에 나타나는 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조밀하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평시에는 비록 관중(管仲)ㆍ안자(晏子)의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재능을 어디다 쓰겠는가? 두예나 이순신 같은 이는 반드시 눈으로 보고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그 정을 생각하면 슬프기만 할 뿐이다.”

많은 경우 비판은 타당한 논리와 근거를 가진다. 비판을 감수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에 대한 당대의 논란도 상식적이고 옳은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만일 선조가 비판 여론에 굴복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지 않았다면 한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전쟁 중에 부채를 만들어 선물해야했던 충무공을 생각하며 흘린 이익의 눈물엔 장군의 고독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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