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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모더니즘 선두주자-막스 리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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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모더니즘 선두주자-막스 리버만
  • 박해정 기자
  • 승인 2014.11.2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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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 구축
▲ 막스 리버만 자화상

전북도립미술관 10주년 특별전 ‘열정의 시대 : 피카소부터 천경자까지’가 내년 2월 22일까지 도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열정과 집념의 시대를 살다간 서양과 한국의 모더니즘 걸작을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전시에는 10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 중 주목할 만한 작품을 엄선해 8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주


두 번째 주인공 막스 리버만은 20세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독일 현대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막스 리버만은 1847년 7월 20일 독일 베를린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김나지움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고 바이마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872년 파리 유학, 1876~77년 네덜란드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잠시 동안 뮌헨에 거주하였으나 1884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일생을 보냈다.

초기에는 바르비종파인 쿠르베와 밀레의 양식에 영향을 받아 노동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이며 어두운 색조로 묘사했다.

1890년부터 인상주의 수법을 익혀 기존의 화풍에 인상주의의 밝은 색조와 빛을 담은 독자적인 화풍을 구사했고 풍경화뿐 아니라 초상화 작가로서도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다.

막스 리버만은 독일의 아카데미즘에 대항해 유럽 화단을 휩쓸고 있는 인상주의 회화에 합류하며 독일 회화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는 1898년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와 로열 미술학교의 보수적 성향에 대항해 진보적인 미술 단체인 베를린 분리파를 설립했다.

분리파의 의미는 ‘분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세케도 (secedo)’에서 유래됐으며 과거의 전통인 아카데미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베를린 분리파는 당시 유럽의 새로운 미술 경향인 인상주의의 흐름을 받아들였고 로비스 코린트와 막스 슬레보크트가 참여하면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됐다.

1909년에 최고 전성기를 맞았으며 회원 97명과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바실리 칸딘스키, 앙리 마티스를 포함한 협력회원 119명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1910년 내부의 논쟁으로 인해 분열하게 됐지만 베를린 분리파는 독일의 현대미술 발전에 시발점이 됐다.

1909년 막스 리버만은 베를린 근교 호숫가에 정원이 있는 빌라를 지어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고 200여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1920년 독일에서 화가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프로이센 예술원’ 원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유대인 출신이었던 막스 리버만은 나치 정부로 인해 예술원 원장 사임을 강요받았고 퇴폐미술전 화가로 낙인 찍혀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그 후 1935년 2월 8일 베를린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으며 쇤 하우저 거리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안장됐다.
박해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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