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88돌을 맞이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을 주도한 우당(憂堂) 권동진(權東鎭, 1861.12.15-1947.3.9)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일찍이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관심을 갖고 19세 때 사관양성소에 입학, 여기서 2년의 군사교육 과정을 마치고 육군 초관으로 근
경술국치 이후에는 천도교 전도 활동에 종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1918년 미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이를 기회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펴기로 결심했다. 교주인 손병희의 지휘 아래 오세창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
이로써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로 구성된 민족대표들이 모여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3·1운동은 마른 초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태화관에서 일경에 피체된 선생은 3년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 독립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출옥 뒤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자치운동을 전개하던 천도교 신파 지도자인 최린에 반대하여 오세창과 함께 구파를 이끌면서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편 것이다.
1927년 좌우합작으로 신간회의 결성이 추진되자 천도교 구파의 대표로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발기인으로 참여, 민족협동전선으로 성립된 신간회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은 물론 나아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 본부는 물론 각 지방 지회의 조직과 활동을 도왔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장으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데 앞장섰다. 이를 통해 광주학생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고 더 나아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 개최를 시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또 다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오세창과 함께 임시정부 환영 국민대회를 주도하고, 신한민족당 당수 및 민주의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3월 9일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 광복회(☎02-780-9662)와 독립기념관(☎041-560-0114)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독립기념관에서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3월 한 달 동안 관련 자료와 사진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는 선생에 대한 공훈 선양 학술 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