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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현령(鼠頭懸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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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현령(鼠頭懸鈴)
  • 전민일보
  • 승인 2018.07.1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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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이다. 원로 한 분이 TV에 나와 이런 얘길했다. 정확한 토씨까지 복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일제시대를 산 사람 모두에 대해 왜 독립운동가로 살지 못했나라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나는 그의 얘기에 공감한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당시 사람들의 실제 삶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1922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광고가 나온다.

“충청남도 경찰부에서는 6월 15일 관 내각 경찰서에서 조선인 순사 채용 필기시험을 시행한다. 지원자는 이력서와 민적 등본을 첨부해 해소관 경찰서로 6월 14일 이전까지 제출해야 시험을 칠 수 있다.(공주)”이에 대해 평범한 조선인들은 일제의 주구가 되는 것을 경멸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순사 시험 인기는 오늘날 공시족의 그것 못지않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충청북도에서는 30명을 채용하는 순사 시험에 500여 명이 지원하기도 했고, 전라남도에서는 35명을 채용하는 순사시험에 477명이 지원하기도 했다. 순사 시험에 합격하면 동네잔치가 열렸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 당시 시험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한 사람은 순사가 된 사람을 친일파라 얘기할 수 있을까. 일개 순사 시험이 그렇다면 고시는 어땠을까? 이른바 고등문관시험은 당시 일본 엘리트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 최고의 자리에 도전한 조선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 시절 만 22세에 변호사 시험합격, 23세에 행정고시와 사법고시 양과에 합격한 인물이 있다. 그리고 25세에 윤길중은 강진군수가 된다.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와 함께 합격한 이항령이 부임지에 가자 군수를 기다리던 당시 원로 기관장들이 그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네 부친은 언제 오시나?”순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른 청년군수가 가졌을 성취감은 대단했다. 강진의 나이든 원로들은 오만한 젊은 군수가 불편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이 엘리트(?) 청년군수에 대해 일제의 주구라는 생각으로 경멸을 표했을까. 아니면 대단한 수재라는 부러움이 컸을까. 전언에 의하면 오만하다는 평을 받은 윤길중은 이후 강진의 지역원로들로부터 한동안 소외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때 그를 음양으로 도와준 사람이 차종채라는 인물이다. 그는 얼마 전 트럼프에 의해 주한대사로 내정됐다 낙마한 빅터 차의 큰할아버지다.

해방 후 조봉암의 진보당에서도 활동한 이력이 있는 윤길중은 5공 시절 민정당에 참여한다.

이 때 그가 지인들에게 만들어준 사자성어가 서두현령(鼠頭懸鈴), ‘쥐목에 방울달기’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쥐에게는 ‘고양이목에 방울달기’가 불가능한 일인데 어린 쥐가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자기 목에 방울을 단다. 고양이 앞에 나간 어린 쥐는 고양이를 향해 이렇게 도발한다. “내가 상대해주겠다. 덤벼.”처음엔 가소롭게 여겼지만 계속해서 약을 올리는 것에 화가 치민 고양이는 어린 쥐를 날름 삼켜버렸다. 그 후로 고양이 배 속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와 쥐들이 안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묘두현령’을 ‘서두현령’으로 해결한 셈이다.

감동을 주는 얘기다. 그런데 윤길중은 왜 이런 얘길 했을까. 일제시대 순사나 군수가 된 것을 자신을 희생한 어린 쥐의 죽음으로 포장하려? 어느 정도 논리의 비약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넌센스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진보당에 참여한 자신이 군부정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나름의 논리일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일제시대 순사와 군수가 된 사람들의 선택을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당시 조선인들의 삶에 대한 철학과 현실의 괴리에서 태생한 모순과 마주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난 순사 시험이나 고등문관 시험과는 무관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윤길중이 TV에서 말한 것은 일정부분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쥐목에 방울달기’의 주체다. ‘서두현령’은 ‘묘두현령’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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