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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한 자에 대한 대처법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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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한 자에 대한 대처법 하나
  • 전민일보
  • 승인 2018.02.23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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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 한 분이 직장을 옮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명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되었을 일임에도 나는 그에게 마냥 축하해준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개인적 선택에 대한 부분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의 선택을 듣고 내가 떠올렸던 것은 ‘절이 싫어서 떠난 중’이었다. ‘네가 여기 떠나면 어디 다른 곳에 갈 수 있겠어?’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을 가지고 상대적 약자에게 모욕감을 안기는 갑질이 어디라고 없겠는가?

궁금한 것은 그렇게 떠나는 중이 많아지는 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이 절에 들어오려는 중은 차고 넘치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어쩌면 그 정도의 무례함과 갑질은 정글속 삶에서 일상으로 마주쳐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다른 절을 찾아 떠난 중의 미래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절의 중이 떠났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제 생각해보자. 중은 절을 떠나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가.

언젠가 은행 강도를 퇴치한 용감한 여직원의 모습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CCTV에 생생하게 담긴 그 장면엔 은행원이 쓰레기통을 들어 강도를 내치는 모습과 함께 어쩔 줄 모르고 달아나는 강도 모습이 담겨 있었다.

먼저 용감한 그 은행직원에 대해 추호도 폄하할 생각이 없음을 전제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하나는 은행 강도가 기본적으로 악한 심성을 가지진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이고 나머지는 어설픈 강도를 만난 은행원의 행운(?)에 관한 것이었다.

근래 뉴스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운 경우가 적잖다. 차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상황에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상식을 소유한 나와 다름없는 평범한 이웃이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닐지라도 무도한 상황 한 번 겪지 않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이 발생한 장소와 대상이다.

특정한 어둠의 장소에서 이성과 상식을 기대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강도를 퇴치한 은행원의 모습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조임도(趙任道)의 <간송집(澗松集)>에는 관련해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만약 봉황이 부엉이와 싸우면 반드시 부엉이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기린이 승냥이나 이리와 다투면 반드시 승냥이나 이리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백이(伯夷)가 도척(盜蹠)과 싸우면 반드시 도척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다섯 가지 색깔과 아홉 가지 특징을 가진 상서로운 날짐승은 사나운 발톱과 부리를 당할 수 없고, 노루 같은 몸에 연약한 뿔을 가진 어진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무는 이빨을 대항할 수 없는데, 얼음같이 맑고 옥같이 깨끗한 선비가 어찌 완고하고 사나우며 교활한 도적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군자는 인애로 하지 폭력으로 하지 않고, 정의로 하지 힘으로 하지 않고, 정직으로 하지 속이지 않나니, 진실로 한때의 승부와 성패로 그 우열을 논할 수 없다. 아! 부엉이가 울면 봉황은 멀리 가고, 승냥이나 이리가 울부짖으면 기린은 달아나 숨고, 음험하고 사악한 자가 뜻을 실현하면 현명한 사람은 은둔하여 자취를 숨긴다. 대개 오직 힘으로 다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함께 다툴 필요가 없는 것은 형세가 그러할 뿐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집필하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사실로서의 역사에서 승자는 때로 정의로운 자가 아닌 불의와 무도한 자인 경우가 적잖았다는 것에 있었다.

그가 열전의 첫머리에 백이숙제를 등장시킨 이유는 현실에서 패배한 정의를 역사의 이름으로 복권시키기 위함이었다. 다행이라면 대부분의 장삼이사에겐 백이숙제와 같은 명분이 없다.

희생을 감내할 가치가 없는 무도한 자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맞서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이유다. 무도함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은 결코 비겁함이 아닌 현명함의 실천이다.

중이 절을 떠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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