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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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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
  • 전민일보
  • 승인 2024.03.08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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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아 누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을 찾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누나, 왜 제게 존대하세요?” 애통리 할머니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순아 누나는 친 누나같은 존재였다.

식모, 그때는 가난한 집 딸은 어린시절 그렇게 보내졌다. 그렇게 입이라도 하나 덜어내야 했다.

막걸리 배달을 하시던 아저씨가 먹던 고봉밥의 강렬한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큰 밥그릇에 담긴 밥의 거의 절반이 봉분으로 솟아올라있었지만 아저씨는 그것을 먹고도 허기진 모습이었다.

국민학교 실과 수업시간엔 친구들과 함께 리어커에 낫을 싣고 풀을 베러 나갔다.

농번기 모내기와 벼베기, 그리고 여름방학 숙제 중 하나였던 잔디씨 모으기와 겨울철 교실난로에 쓸 솔방울줍기도 그 시절 학교생활의 일환이었다. 쌀을 아껴야한다고 혼·분식을 장려했고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하다’며 아이 많은 부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너무도 많은 채널의 홍수 속에 한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기 힘든 오늘이지만, 그 시절 단 2개의 채널이 전부인 흑백 TV에서 방영하던 ‘타잔’은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타잔을 온전히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전기가 끊겼기 때문이다.

누군가 오늘 이런 상황을 접한다면 인권유린과 아동학대 그리고 저출생을 초래한 근본악이라 얘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 자기의 모습에 모든 것을 투영하기 쉽다.

진부하지만 카(E. H. Carr)가 얘기한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오늘 모습을 과거 상황과 연계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가 오만이자 폭력이다.

누군가 얘기한다.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오랫동안 일본 문화 수입을 막았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다’ 또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살인자’

해방 직후 조선인에게 일본어와 일본문화는 오늘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었다. 그 시절 국민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에게 국어는 일본어를 의미했다. 만일 일본이 50년만 더 조선을 지배했다면 조선어의 운명은 게일어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 대한 민족감정이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느끼는 것 이상인 아일랜드인들이 왜 지금 영어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일본 지배의 그림자가 사회 모든 영역에 아직도 짙게 남은 상황에서 정부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해방부터 김대중 정부 전까지 일본문화 수입을 막았던 것은 국가 독립과 민족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한시적이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K팝을 필두로 세계적인 문화강국으로 떠오른 오늘 한국 모습을 보면서 그 시대의 문화정책을 얘기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4·3 사건을 비롯해 해방을 전후한 비극적 사건에 대한 접근도 다르지 않다. 한 사건에 대한 비판은 그 원인과 경과 그리고 결과 모두를 살펴서 판단해야 한다. ‘콜래트럴 데미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논쟁적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나오게 된 배경엔 주목할 필요가 있다.

9·11 당시처럼 납치된 민항기가 롯데타워를 향해 날아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항기를 격추하면 무고한 승무원과 승객이 사망할 것이다. 그렇다고 격추를 실행한 사람을 향해 살인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한 인터뷰에서 4·3 사건을 이렇게 정의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

약자에게 민족주의는 선(善)이다. 역설적으로 강자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악(惡)이 될 수 있다.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시절의 민족주의와 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춘 오늘 대한민국의 민족주의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개념 정립조차 완전하지 않다. 이성(理性)은 감성(感性) 그 너머에 존재한다. 감성만 남고 이성은 사라진 사회는 그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 된다.

라떼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필독서였다. 이제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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