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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顯宗)과 조선 선조(宣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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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顯宗)과 조선 선조(宣祖)
  • 전민일보
  • 승인 2024.01.0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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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 전쟁이 드라마로 방영중이다. 고려는 대외 전쟁은 물론 외교에 있어서도 조선과는 대응방식이 달랐다. 그 중에서도 거란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고려 외교와 군사적 실력은 지금 봐도 흠을 찾기 어렵다. 한족(漢族) 왕조인 명(明)에 대한 맹목적 사대에 매몰되었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송(宋)과 거란사이에서 다자외교를 잘 수행했다. 군사적으로도 귀주대첩에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위상을 동아시아의 강자로 각인시킬 수 있었다. 당시 군주가 현종이다.

고려 현종(顯宗)과 조선 선조(宣祖)에겐 몇 가지 닮은 부분이 있다. 먼저, 두 왕은 그들 이후 왕통의 본류가 된다.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모든 왕은 그들 후손이었다. 두번째, 정통성 부분에서 취약함이 있었다. 현종은 왕건 손자였지만 사생아였고 선조는 방계가 왕위를 계승한 첫 사례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재위 중 전란을 겪어야 했다. 거란과 일본 침략이다.

몽진을 선택한 것도 같다. 현종은 거란 3차 침략 때는 개경에서 귀주대첩을 지휘했지만 2차 침공 당시엔 나주까지, 선조는 평양과 의주로 피란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이후 평가는 완전히 상반된다. 당대 최충의 평가다.

“현종 치세야말로 주나라 성왕(成王)·강왕(康王)과 한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후대 이제현(李齊賢)은 최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현재는 고려 현종을 조선 세종과 비교할 정도의 명군으로 평가한다. 반면 선조에 대한 오늘 시각은 전란을 초래하고 백성을 등진 비겁한 암군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종과 선조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전쟁 수행 과정은 물론 그 이후 역사전개와도 관련이 있다. 현종은 강감찬을 진심으로 존경해 예우했지만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의심과 경계로 가득했다.

전쟁 후의 상황도 다르다. 고려는 현종 이후 100년 동안 동아시아 강자의 위치에서 평화를 구가하고 문화를 창달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달랐다. 송과 요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며 양자에게 구애의 대상이 되었던 고려와 명과 청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은 조선의 위치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조로서는 억울한 점이 있다. 거란 2차 침입당시 현종이 그랬던 것처럼 선조가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른 것도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몽진을 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일본군과 일전을 치렀다면 시나리오는 둘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선조와 조선군이 사즉생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면 승리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오늘 우리 상상에서 가능한 일이다. 부산성, 동래성 그리고 조선 최정예 군을 이끌던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전력차는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였다. 왕이 있는 서울에서의 결전이 진주성 전투와 같을 수는 없다.

선조가 죽거나 포로가 되는 상황은 왕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다.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떠났던 것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영화, 유튜브에서까지 다양한 역사해석이 등장한다.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질적 발전을 가져온다. 다만 거기엔 전제가 있다.

비판적 안목과 다양한 견해가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선조를 한국사 최고의 빌런으로 얘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을 허용하는 범위와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을 초래한 군주로서 선조가 져야할 책임과 비판은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역사해석에서도 ‘다수의 전제성’은 우리가 살펴야 할 바다.

강조가 폐위한 목종(穆宗) 후임으로 현종이 왕위에 오른 것이 거란 2차 침략의 명분이었다. 그리고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했다. 선조가 서울을 떠나 평양과 의주로 피란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평가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몫이다.

장상록 칼럼리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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