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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 영웅 최무선의 과학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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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 영웅 최무선의 과학 정신
  • 전민일보
  • 승인 2023.10.2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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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이고 고려때부터 쌀의 집산지였다. 고려 12곳 조창 중의 하나인 진성창이 있어서 쌀을 노리는 왜구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380년 8월(음력) 하순 늦가을이었다. 추수가 거의 마무리되고 겨우살이 준비에 들어갈 때이다. 곡간에 추수한 양곡을 채워 느긋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왜구가 침범해 왔다.

식량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끌고 가기도 했다. 이때 전라감영의 장계가 조정으로 날아온다. 조정에서는 분통과 울분을 참지 못해 어전회의를 열어 왜구에게 당한 피해 이상으로 응징할 것을 명한다.

최무선이 만든 화약 무기가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최무선(출생?~1395)은 고려말 1377년(우왕 2년) 원나라 사람 ‘이원’에게 화약제조법을 배워 제조한 18종의 화약과 화포로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의 영웅이자 고려 말기 장군이며 무기 발명가로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었다.

무관이었던 그는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포를 만들기 시작했다.

‘화룡도감’에서 만든 무기는 모두 18가지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 이장군, 석포, 화포, 화통 등이며 화진, 철령진, 피령진 등은 발사물이고 그밖의 철판자, 유화, 촉천화 등과 로켓무기인 주화 등이 있다.

왜구가 금강하구로 쳐들어 왔을 때(1380년) 부원수가 되어 자신이 만든 각종 무기를 이용하여 왜구 병선 500여 척을 전멸시키는 공을 세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화약 연구에 몰두하여 ‘화약수련법’, ‘화포법’의 저서를 남겼고 아들과 손자에까지 화약기술을 익히게 한 뒤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태조실록 4년(1395)에 최무선 창의에 병기제조, 정비의 내용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무선의 감독으로 화약을 제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각종 화구를 발명하여 갖추었다. 이는 병기와 전술의 일대 혁명이라 할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동국여지승람’군기사편에 보이는 ‘화약고기’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최무선의 약전을 통하여 실로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먼저 왜구를 물리쳐 국내의 안정을 기하려는 애국 충정이 첫째이고 과학하는 그의 창의력이 화약, 화포를 발명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근세의 전략상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점이 둘째이며, 못다 한 유지를 아들에게 전승시킨 점이 세 번째라 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최무선과 군산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가 만든 무기며 병선은 우리나라 육·해전 사상 최초로 진포대첩에서 사용되었는데 군산이 그 현장이다. 그 당시 우리가 썼던 무기는 천지를 진동시키고도 남을만한 첨단무기였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음력 8월 당시의 계절로 보아 추수가 끝난 후였다. 왜군들이 배를 몰고 온 것은 군산 성산면 창오리 소재 진성찬의 쌀을 노린 것이다. 진성찬은 현 나포면 서포와 연계되어 있다. 당시 전라도지역 평야지대의 쌀을 모두 모아 보관했다가 이듬해 3~4월에 예성강구로 반출 수송했던 것이다. 그 기지가 조종포(지금의 서포)였다.

당시 왜구가 얼마나 많은 쌀을 약탈했는지 그때 쌀을 운반하면서 흘린 쌀이 발등을 덮었다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게 왜구들에게 쌀과 농작물을 약탈당하면서 이들의 횡포를 견디어야 했지만 최무선의 과학정신에 의한 무기 개발이 왜군을 물리치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반도의 중요한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광복이 될 때까지 수탈의 역사를 불러왔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강제 개항(1899. 5. 1)이 된 군산은 쌀수탈의 거점이었다.

군산 개항의 날은 5월 1일이지만 쌀 수탈의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개항이 된 치욕의 날이기에 진포대첩승리의 날인 10월 1일을 시민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개항이 된 지 124년이(2023) 된다.

진포대첩은 군산의 현장이면서 승리의 현장인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인 주화를 개발한 로켓 과학자 1호인 최무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대한 과학자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최무선의 경우에서 보듯 그 공이 매우 큰 것이다.

1995년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던 것은 최무선의 과학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 고장 진포(군산)가 오랜 세월 동안 수탈의 역사가 되었던 곳임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될 것이다.

오현 수필가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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