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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 짧은 인연 그리고 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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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고 짧은 인연 그리고 4초
  • 전민일보
  • 승인 2021.09.14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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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전, 수원 동생 집에 갔을 때다. 엘리베이터에 어린 소녀가 탔다. 아이는 먼저 탄 우리를 보고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순간 그 공간의 어색한 침묵은 떠나갔다.

난 소녀를 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아이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고 있겠구나.”

1분도 되지 않는 인연이었지만 그 시간을 미소짓게 해준 소녀에게 지금도 감사한다.

20대 초반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만난 노년의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은 나를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고서 미소와 덕담을 건넸다. 그것은 피레네를 넘는 기차 옆 좌석에 앉았던 스페인 아주머니의 그것과 꼭 닮았다.

난 그 분의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내 손에 쥐어준 사탕과 작은 빵 그리고 미소를 통해 충분한 행복감을 느꼈다.

스페인 아주머니는 내게 ‘정(情)’이라는 단어가 한국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너무도 얕고 짧은 인연, 특별한 기적이 없다면 내가 그들과 재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과 수 십초, 수분, 그리고 길어야 수일의 기간이 만든 인연의 고리이니 일견 당연하다.

때로 그것은 정반대의 악몽과 같은 인연일 수도 있다. 삶은 수많은 얕고 짧은 인연의 조각들로 이뤄진다. 그 인연 하나 하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인생의 소소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이제 내게 묻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얕고 짧은 만남을 통해 잠시나마 행복감을 선사한 존재였던가?

천륜(天倫)은 논외로 하더라도 깊고 긴 인연도 있다. 두려운 것은 그것의 끝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진정한 사랑’과 ‘진실한 친구’를 찾게 된다.

한때 그렇게 친함을 가지고 신뢰했던 대상들이 어느 순간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던 기억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와 실망을 주었을 것이다.

열성 팬이 어느 날 돌아서면 극단적인 안티가 되는 것은 비단 연예인만의 일은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인 나도 경험하는 일이다. 누군가 내게 과한 칭찬과 애정을 보여줄 때 느끼는 부담감은 진행형이다. 그래서 떠올린다.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다.(君子之交淡如水)”

아무 맛이 없고 자극적이지 않지만 생존과 목마름을 해소시켜주는 물과 같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분명한 삶의 이유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 또 하나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 원인을 누가 초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만큼 잘잘못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와의 인연이 얕고 짧은 것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만을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가 내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준 존재라는 사실은 여전하고 그에 감사한다.

피천득이 아사코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가지는 아쉬움과는 다르겠지만 때로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충분한 인연은 너무도 많다.

내 주변에서 얕고 짧게 만나는 누군가에게 진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 어린 소녀가 내게 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다면 깊이가 얕고 짧은 시간이라 한들 무슨 큰 문제이겠는가?

내 얕고 짧은 전문(傳聞) 풍월에 따르면 우주 1년(지구 공전주기로 2억년) 동안 평균적인 인간 삶의 길이가 4초라고 한다. 그나마 4초는 대단한 선심의 결과다.

우주 탄생부터 헤아리는 인간 삶의 공간과 시간은 먼지와 찰나(刹那)라는 말도 과분하다.

언젠가 흑해(黑海) 연안 트빌리시에 가보고 싶다. 거기엔 또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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