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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도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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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도 아녀
  • 전민일보
  • 승인 2021.08.2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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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는 말만큼 그리운 낱말이 고향일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 그래서 난 내 고향이 두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태어난 남원이 본향이고 자라난 고향은 전주다.

남원은 내가 여섯 살 때 떠났으니까 지리(地理)도 잘 모르고 다만 외갓집 동네로서 추억이 더 아련하다. 부모님의 고향도 남원이니 남원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마치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듯 익숙한 곳이다. 남원 요천수 위의 금수정현판을, 외삼촌이 열일곱 살 때 썼던 글씨라며 말씀하시던 엄마의 모습에선 외가의 자존심이 묻어났고, 덩달아 내 어깨도 으쓱해졌다. 그래서 춘향전마저도 내 이웃 이야기처럼 반갑고 광한루도 자주 가보고 싶은 곳이다.

‘뒷독거리’라고 불렀던 외가 마을엔 항상 마르지 않는 고시암(고샘)이 있었다. 마을의 공동생활 터였다. 엄마가 일하러 나오는 곳엔 항상 아이들로 소란스러웠다. 때론 개구쟁이의 말썽으로 튀어나오는 엄마들의 구수한 욕설이 웃음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수도꼭지만 달랑 세워져 있고 그 넓던 미나리꽝은 시장(市場)이 되어버렸다. 외갓집마저 떠난 그곳은 잃어버린 고향 마을이 되어 이젠 찾아가 봐도 씁쓸하다.

아버지의 근무처에 따라 오수를 거쳐 임실까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전주생활이 시작되었다.

풋풋한 중학교 시절, 담도 없던 경기전 뜰은 우리의 숨바꼭질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여고시절에도 친구들과 더불어 산과 들을 우리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꼬부라져 돌아가는 오목대의 철길은 마치 그 끝에 연보랏빛 행운이 기다려 줄 것만 같아 가슴 설레었다.

삶이 뭔지도 모르면서 가늘고 길게 사는 인생보다 짧고 굵게 살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오목대에서 밤마다 들려오던 트럼펫 소리는 지금까지도 연주자를 모른 채 나의 사춘기를 곱게 채색해줬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주는 그렇게 나를 여물게 했다.

국가의 부름에 따라 대구로, 서울로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동경하는 서울 생활이었지만 사는 건 어느 동네나 다 똑같았다. 아이들 키우며 직장 생활까지 바쁘게 살다 보니 그토록 사랑하고 가고 싶어 했던 전주에 갈 기회도 줄어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골목 밖이 수선스러워 나가보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어젯밤 옆집에 숨어든 도둑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집 아주머니의 말에 너무 속이 상했다.

“어젯밤 그 도둑놈 전라도치야.”

“왜?”

“담을 넘으려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글쎄 ‘썩을 년, 깜짝 놀랐네.’ 이러잖아. 전라도 사람들이 썩을 년이라고 말하거든.”

“맞아 전라도 사람들이 썩을 놈이라고 욕을 잘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잘 알지도 모르면서 썩을 년 소리 했다고 전라도라 매도하다니. 어찌 전라도만 썩을 년이라고 욕할까.

1970년대 서울의 봉천동이나 신림동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학부모들도 전라도 사람이 많아 교사인 내가 사투리를 써도 아이들은 이상해하지 않았다. 서울 토박이들이 전라도 사람이 많이 들어와 자리 잡고 사는 것이 못마땅했을지는 모르나, 이웃 간에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던 터였다.

그런데 그 ‘썩을…’ 소리에 서울 사람이 지방색을 드러내며 경계를 했으니 화가 난 전라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골목 안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출근하려던 아저씨들까지 합세하여 하마터면 아침부터 지방싸움이 벌어질 뻔했다.

어디선가 ㅇㅇ집 욕쟁이 할머니가 나타나 이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이 썩을 것들아. 같은 나라 사람끼리 경상도면 어떻고 전라도면 어뗘?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세상 넓은 줄도 모르고 쌈박질은…. 이제 배때기가 따뜻한 게 할 일 더럽게 없나 보네. 쓰잘데기 없이 입씨름하지 말고 힘을 합쳐 나라나 똑바로 세우라고, 썩을 놈들아.”

요즘엔 썩을 사람도 드물다. 거의 모두 화장(火葬)하고 있으니 썩을 틈이 어디 있겠나. 썩을년은 욕도 아녀.

양영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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