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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지난 후의 남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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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지난 후의 남겨짐
  • 전민일보
  • 승인 2019.11.2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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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황지우 시인의 시 <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 지나가 만들어진 그 위를 오간다. 그리고 그 궤적을 길이라 말한다.

 
눈길의 선두에 나선 늑대가 개척한 그곳을 나머지 무리가 따르는 것도 그렇다. 그렇기에 전인미답을 개척해야하는 당사자는 그 대상이 사람이건 늑대이건 공동체를 위한 엄숙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평가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가연구>라는 빛나는 업적을 통해 한국 향가를 완벽히 해석한 양주동 박사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에 대한 평가가 더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노벨상 수상논리와도 일치한다. 그 어떤 실용적 응용기술도 첫 걸음을 넘어설 수 없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여정을 통해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었다.
 
봉건과 식민지, 전쟁과 가난으로부터 단기간에 성취한 산업화, 근대화 이론을 종속 이론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준 거의 유일한 사례, 그리고 민주화의 절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역동성.
 
거기에 더해 군사적으로도 지구상 그 어떤 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역량을 갖춘 나라.
 
말 그대로 기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룬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다.
 
토드 부크홀츠는 <다시, 국가를 생각하다>에서 국가 쇠망 징조를 다섯 가지로 얘기하고 있다. 저출산, 무역 증대, 부채 증가, 근로의지 쇠퇴 그리고 다문화로 인한 공동체성의 소멸.
 
그가 근거로 제시 한 것은 제국 몰락사였지만 현재 대한민국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것을 비판 없이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는 거울은 될 수 있다.
 
한때 외국 사례를 인용하며 가르침을 강요하던 때가 있었다. 한 해 3천만 명이 외국을 다녀오는 한국인에게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지구상 인류가 다녀온 거의 모든 길을 한국인 누군가는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다녀온 길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지구상 그 어떤 나라도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들어야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계 유일의 0점대 출생률은 기적의 종말과 함께 미래세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될 것이다.
 
어쩌면 훗날 이 땅의 주인은 더 이상 단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원주민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현명하다면 결혼생활의 불편함,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 양육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누가 결혼할 것인가?”
 
그렇다. 에라스무스의 말처럼 한국인은 너무도 현명하다. 그래서 암울하다. 모든 구성원이 너무도 현명하고 계산에 정확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사라질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인류가 지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때로 미련함을 기꺼이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을 희생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현실이 아닌 이상을 따른 것이 어찌 현명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은 언제까지 현명함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성리학은 송의 주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궁극적인 적용은 조선에서 이뤄졌다.
 
같은 방식의 추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일지 모르지만 그 궁극에는 대한민국이 존재하리라 믿는다. 성리학이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개혁을 위한 궁극적 방법론으로서였다.
 
자신 편에 선 사람의 수가 많으면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생각의 합리성(?)에 대한 우려는 노파심일 것이다. 다만, 내 어리석은 생각의 한 조각을 감히 말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명함의 절정이 아니라 에라스무스가 던진 우신(愚神)의 말이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하지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다.”
 
우리가 오늘 지난 후의 남겨짐은 훗날 길이 될 것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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