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6 21:28 (금)
종이 책의 종말이 초래할 미래
상태바
종이 책의 종말이 초래할 미래
  • 전민일보
  • 승인 2019.09.18 0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7월 블라디보스톡에 갔을 때 유심히 살폈던 것이 있다. 노점상까지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던 러시아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가 접한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비록 짧은 3일이었지만 독서하는 모습은 물론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러시아인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다. 대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이 손에 들고 끊임없이 바라보던 스마트폰이었다. 적어도 러시아에서 확인 한 사실이 있다.

스마트폰은 이제 구텐베르크의 성경이 그랬듯 변혁의 중심에 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단순한 금속활자 인쇄물이 아니다. 그것의 등장은 정보혁명이자 시대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아쉽지만 그 보다 78년 먼저 세상에 나온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금속활자로 인쇄한 단순한 책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식의 대중화를 이루지도 못했고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유도하지도 못했다. 변화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 방향성과 더불어 불가역적인 결과물의 도출이 필요하다. 구텐베르크의 성경과 직지심체요절의 차이다.

손에 슈퍼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그렇기에 스마트폰은 모두가 전문가인 시대를 만들었다.

내가 농업인을 대상으로 ‘올바른 토양관리’나 ‘감자 재배’를 주제로 강의를 할 때 교육생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내가 전달하는 내용을 확인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묻는다. “내가 검색해보니 내용이 좀 다른데요.”

그것은 분명 의미 있는 행위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정보가 때로 부정확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오래된 자료도 있을 수 있으니 그 점 참조해서 이용하라는 당부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럼에도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그 놀라운 마법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검색은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은 때로 기적을 연출한다.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에 대한 나의 기억 중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히 지적한 사람이 그 책을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검색의 신기를 통해 경지에 올랐다면 이것을 달리 뭐라 얘기할 것인가.

어찌 러시아인 뿐 이겠는가. 이제 인류에게서 종이 책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한들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스마트화한 인간이 되기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인스턴트 지식이상의 깊이를 스마트폰에서 찾을 수 없는 부적응 인간이기에 그렇다.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는 나 같은 낙오자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세상은 변한다. 종이 책의 미래라고 다르지 않다. 디지털을 거부해 낙오한 코닥과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칸트(Immanuel Kant)가 <순수이성 비판>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는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거의 1년이 지나 겨우 나온 서평조차 완전한 오독이었다.

독일어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의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칸트와 원효를 읽을 수 있도록 해줄까. 분명 그것에 대한 해제와 요약본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정보에 불과하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다. 다만, 사고와 통찰의 시간까지 스마트폰이 줄 수는 없다.

책은 읽지 않고 스마트폰 검색만하는 인류가 인공지능(AI)과 비교해 어떤 우위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책장을 넘기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때론 단련의 과정이기도 하고 때론 저자와의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기도 하다.

정조(正祖)가 즉위하던 그 해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미국의 국부(國父)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활약하고 있었고 독일엔 칸트가 있었다. 혹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도전에 나섰다. 칸트를 만나기 위해서다. <순수이성 비판>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그 지난한 시간이 두렵지만 여전히 설렌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2024 WYTF 전국유소년태권왕대회'서 실버태권도팀 활약
  • 군산 나포중 총동창회 화합 한마당 체육대회 성황
  • 기미잡티레이저 대신 집에서 장희빈미안법으로 얼굴 잡티제거?
  • 이수민, 군산새만금국제마라톤 여자부 풀코스 3연패 도전
  • 대한행정사회, 유사직역 통폐합주장에 반박 성명 발표
  • 맥주집창업 프랜차이즈 '치마이생', 체인점 창업비용 지원 프로모션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