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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8.01.24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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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 교수님께서 손에 큼지막한 쇼핑백을 들고 들어오셨다.

약간 멋쩍어하시면서 탁자에 내려놓은 쇼핑백에 롱코트가 들어있었다. 얼마 전 지나가는 말로 닳아지기 전에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체형이 비슷하여 안성맞춤으로 내 몸에 딱 맞았다. 언젠가 한 벌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새삼 바람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새것을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교수님은 서둘러 연구실을 나가셨다.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얼굴만 겨우 볼 수 있는 작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10여 년 전에 산 반 패딩을 입을 때와 달리 키가 커 보였다. 게다가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교수님께 따뜻하게 잘 입겠다고 문자를 드렸다. 잠시 후 답 글이 왔다. 새것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하시며 그저 편하게 입어주길 바란다고 하셨다. 다시 답 글을 보냈다.

새것보다 더 좋다고, 진심이라고, 잘 입겠다고 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라, 새것보다 더 마음에 들고 편했다. 우선 새옷을 받았다면 적지 않은 옷값과 무엇인가를 보답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30여 분 후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이미 약속한 터였다. 롱코트를 입고 나갔다. 그 교수님 외에 다른 교수님과 동행했다.

실은 다른 교수님께서 옷을 먼저 달라고 했기 때문에 옷의 출처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우리가 옷을 달라고 한 것은 99%가 농담이었다.

농담으로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옷을 그냥 주신 것이다. 또 마다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받아 입었다.

늦은 시간 초승달을 앞세우고 귀가했다. 아내가 롱코트를 입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전에 아웃도어를 주신 분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이어서 핀잔이 쏟아졌다.

농담해도 농담 나름이지 어떻게 입고 있는 옷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 상대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냐, 그 교수님은 사모님한테 뭐라고 했겠느냐와 같은 것이었다.

99% 농담이었다고 변명했다. 아내는 핀잔의 엔진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가동했다.

사람 감정을 어떻게 수치로 정량화할 수 있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진심이 1% 개입했지 않느냐, 학생들에게 논리적인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왜 그렇게 합리와 담을 쌓을 수 있느냐, 사람이 왜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느냐, 유머를 구사한답시고 제발 너무 나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신한테 잘 어울리긴 하네요.”

아내가 핀잔의 가속페달을 더 이상 밟지 않았다. 아내가 염려한 것과 달리 나는 그 교수님의 진심을 결단코 오독하지 않았다.

비록 지나가는 말로 옷을 달라고 했지만, 내가 한 말을 오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내 안에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옷을 받은 것에 관해 부담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간단한 소찬에 커피나 한잔 사는 것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우리는 세상살이하면서 이런저런 선물을 주고받는다. 선물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값이 비싼 것은 좋은 선물이고 값이 싼 것은 그저 그런 선물일 수 없다. 연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값진 선물이 없을 것이다. 새것이 가치 있는 선물이고 쓰던 것은 무가치한 선물이 아니다.

판박이처럼 생긴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몇 자 안 될망정 정성들여 쓴 문장이 더 의미 있는 선물이다. 손편지에 우표를 붙여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참 성탄절이 바로 눈앞에 왔고 세밑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성탄 카드와 연하카드를 만들어 보냈던 것이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한때는 화선지에 어쭙잖은 붓글씨를 써서 낙관을 눌러 지인들에게 줄기차게 보냈다.

요즘은 대부분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성탄절과 새해를 축하하고 축복한다. 똑같은 그림 영상이나 음악을 여러 사람한테 받으므로 가난한 시절 밥상에 징그럽게 올라왔던 시래깃국처럼 물린다.

선물은 꼭 다른 사람한테 받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도 귀한 선물이다. 우리가 모두 올 한해 잘 살아왔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승진되었는지, 평수가 큰 집으로 이사한 것보다 중요한 선물이 있다.

우리 심장이 멎지 않고 이 순간까지 뛰고 있잖느냐. 숟가락 들 수 있는 손이 있고 젓가락질 할 수 있는 손가락이 있지 않으냐. 신발 신고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지 않으냐. 혈관에 피가 멎지 않고 흐르고 있지 않으냐. 그래서 감히, 감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세밑, 자신에게 칭찬을 한마디씩 선물로 건네자. “험한 세상, 힘들었지만 잘 버텨 준 내가 대단해.” “늘 잠이 부족하고 피곤했지만, 쓰러지지 않고 달려온 널 사랑해.” “좋은 사람들 만나 행복한 시간 보낸 내가 기특해.” “상처 준 사람 몇몇 때문에 숨 막혔지만, 참고 견딘 것 참 잘했어.” “사랑하는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있어 시심 꺾지 않은 내가 부러워.”

창밖에 햇살이 맑고 정갈하게 소복이 쌓이고 있다.

이 겨울, 저 햇살은 추위를 멀쑥하게 견디게 하는 푸짐한 선물 아니겠는가.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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