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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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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언니
  • 전민일보
  • 승인 2017.09.29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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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얻어온 두 포기 봉선화가 경쟁이라도 하듯 피어난다.

크지 않은 화분에서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날 때는 예쁘고 신기해서 매일 세어보던 것을 초록 잎 사이사이 진분홍 꽃잎이 너무 빼곡해서 이제는 포기해버렸다.

가장자리에 톱니까지 가진 쭉쭉 뻗은 믿음직한 잎과 곧은 꽃대의 보호로 가녀리지만 당당하게 피어나 절정을 이룬다. 청상의 언니도 이런 절정일때가 한번은 있었을까?

무더위 속에서 견뎠을 엄마의 고통을 생각하며 미역국을 끓이고 아직은 더 살아야 할 의무감에 잡채도 만들어 아침상에 놓았던 내 생일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흰 국화꽃에 쌓인 언니와 마주했다. 말굽자석 같이 휜 몸으로도 얼마나 빠르게 달려와 “아이고, 우리 동상들, 내 동상들”을 외치며 반가워하던 때가 언제던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니 바쁜데 올 것 없다는 조카 말을 고맙게 들었던 이기적이고 무심했던 내가 영정 앞에서 쏟은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세 살에 엄마를 잃고 네 살 때 맞은 스무 살 새엄마에게서 얼마나 사랑을 받았다고, 생전의 언니는 그때가 좋았다는 말을 수시로 했었는데 진심이었을까?

모니터를 보면서 아픈 부위에다 연달아 세 대의 주사를 놓은 정형외과 의사는 “이 주사 맞을 때 못 견뎌 하는 환자가 대부분인데 잘 참는 것을 보니 정말 많이 아팠나 보다”했다. 그랬다. 아무리 아파도 순간인 것을, 몇 달 동안 지속되던 통증에 비할 수 있을까? 언니 말이 생각났다.

청상이 된 이후 삶이 얼마나 힘들고 팍팍했으면 그리 행복했을 것 같지 않은 그 시절을 행복으로 느꼈을까.

전시(戰時)에 총탄을 맞아 형부는 사망하고 언니는 상처를 입었지만, 군인 아닌 민간인이 받을 처우는 없었다.

언니 인생 2막은 그렇게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처 입은 몸에 어린 아들과 청상이란 딱지 하나 얻고 막을 내린 뒤 긴 고난의 3막으로 이어졌다.

젊은 며느리 재가를 예견하는 시댁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삯바느질로 30여 년 세월을 견디며 그때 굳어졌을 표정이 바로 영정 모습이 아니던가.

아니, 부부 교사 아들 며느리 살림을 도맡아 손자들 키우며 그동안의 고난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활기차 보이던 때도 있었다. 길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가 절정은 아니었을까.

내려앉을 듯 눈앞에 있던 하늘이 고개를 힘껏 젖혀야 할 만큼 올라가자 셀 수 없이 피워대던 봉선화 꽃잎이 멀어진 하늘을 그리워함인가.

하나둘 떨어지고 시들어간다. 힘 있게 뻗쳐 꽃을 보호하던 진초록 잎도 희끗희끗 서리 맞은 듯 혈기 잃은 모습이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싱싱한 제라늄 옆에서 초라한 모습이 안쓰러워 차라리 치워버릴까 하다가 또 언니생각을 한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을 챙기며 행복해하던 때도 잠시 인생 마지막을 향하는 시기가 가까워져 오는 몸은 총탄의 악몽과 함께 빠른 쇠퇴기에 접어들어 병원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에는 움직이기 힘든 몸과 정신의 혼미함까지 겹쳐 요양병원 환자가 되어 과거의 기억만 존재했다.

옆에 있는 성인은 두 남동생 중 누구냐 일뿐, 아들은 없었다며 그저 소중한 동생이 옆에 있다는 것을 흐뭇해 했다고 조카는 말했다.

당신 옆 보호자는 기억에서 사라진 남편이나 책임져야 할 어린 아들이 아닌 든든한 성인 남동생이라는 생각에 머문 것이 짠하면서도 아흔셋 인생 끝이 초라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반듯하게 키우려 호되게도 다뤘던 아들의 직계가족 여섯의 오붓한 배웅받으며 떠나게 되었으니. 거기에 요즘 대세인 연상연하 커플같이 이십 대 남편과 구십 대 아내의 만남이라니. 떠남이 슬픔만은 아니다. 베란다 화분의 봉선화를 정리해야겠다. 부푼 주머니 속 잘 익은 씨앗에게 내년 여름을 부탁하며.

이용미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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