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감정표출의 수위가 혐한(嫌韓)으로 극을 달리고 있는 비정상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웃하는 나라들의 역사까지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은 행태로 일관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럴까?
한일관계는 고대사부터 살펴봐야 된다. 일본의 원류는 서기 6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망한 백제 왕족들과 토후들은 난민이 되어 금강을 뒤로하고 부흥을꿈꾸며 일본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부흥군마저도 663년에 백촌강(지금의 금강 하구언) 전투에서 완전 패망하게 된다. 이때를 일본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끝났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 다시 와 볼 수 있겠는가?”그렇다. 왜 측에서 보면 우리 한반도는 조상님의 나라이다.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조상님의 나라로 여기는 일종의 컴플렉스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백제왕족의 난민들은 조상님의 나라와는 그것으로 끝이고 왜의 최고계층인 천황일가로 합류하여 왜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문화경제분야를 통일신라를 시작으로 고려·조선으로 부터 배워 스승의 나라, 선배의 나라로 모시게 되다.
이러다가 15세기 초반에 포르투갈 상인들을 만나서 유럽 선진문물을 접하게 된다.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난 후, 각 계파간의 내부조직의 갈등을 불식시키려고 임진왜란 즉, 자기네들의 옛 땅을, 고토(故土)를 찾으러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1867년에 명치유신이 일어나면서 다시 정한론(征韓論)이 고개를 들게 된다. 물론 이때까지는 조선은 스승의 나라, 물주에 나라였었는데 제국주의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이 조선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즉 한국을 넘어서지 않고는 일본의 기를 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편 명치유신 직후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 첩자를 보내어 각국 정보를 수집하는데 만주벌판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것을 알고 비문을 조작하여 한반도의 가야지역이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였다고 만화 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또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었던 칠지도(七支刀)의 60여자를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왜왕이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조작한다. 그리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은 믿을 수 없다고 일본서기만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정한론의 구실을 이론적으로 차곡차곡 만들기에 이른다.
결국 탈아입구를 표방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을 식민화하고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하게 된다. 우리 한반도를 일본의 일부로 생각하는 가장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공주·부여일대에 일본 천황무덤을 옮기려고 까지 했던 것은 단순한 정한이 아니라 자기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복토(復土)차원이었다.
명치유신 후에 현재까지 약 150년을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를 하였으나 최근에 한국의 정치·경제의 성공과 중국의 대국화가 성공하고 일본의 대표 기업인 소니를 비롯한 많은 일본기업이 삼성을 비롯한 여러 중국·한국기업에 제압을 당하자 명치유신 이전의 고대·중세사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일본의 자연재해까지 더해지고 이에 불만과 불안의 극치에 다다르자, 이 사람들의 본색인 내부문제를 외부로 돌려 잠재우려는 특유의 섬나라 근성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독도를 비롯하여 제반문제들로 생트집을 잡고 우리나라의 잘 나감을 시기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즉, 일본인들 자기 자신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일종의 콤플렉스의 노출인 것이다.
몇 칠 후면 96주년 3·1절이 돌아온다. 이제는 우리 대한민국은 극일(克日)·항일(抗日)을 넘어 우리 자신이 임진왜란 이전의 대국(大國)으로 돌아가야 한다. 최소한 일본에 관한 한, 스승의 나라, 조상의 나라, 어버이의 나라, 그리고 일본뿌리의 나라로 돌아가 우리의 대범·근엄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