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농촌지도사라는 공무원이다 보니 내 칼럼을 보고 의아해 하시는 분이 적지 않다.
“아니, 농촌지도사가 무슨 칼럼을 써.”, “공무원이 그런 글 써도 괜찮겠어.” 지금까지 썼던 200여 편 가까운 글 중에 농업과 관련 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고, 때론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항도 써왔으니 그들이 의아해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나는 농촌지도사가 되기 전부터 글을 써왔다. 내 생업과 칼럼니스트의 삶이 꼭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감사한 것은 그런 내게 정기적으로 쓸 공간을 마련해준 첫 신문이 [전민일보]라는 점이다.
어쨓든 위의 여러 얘기조차 칼럼을 읽어보고 얘길 해주는 사람에겐 감사한 마음이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얘기가 불편한 것은 그들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기에 그렇다. 다른 한 편으로, 내 칼럼을 아껴 주시는 한 분은 또 이런 말씀을 하신다. “농업기술센터나 농촌지도사를 빼고 다른 사회적 직함을 넣지 그래. 사회봉사단체 직함도 괜찮고 그냥 칼럼니스트로 내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사람들이 내용도 보기 전에 직종과 직책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니 말이야.” 애정 어린 그 분의 말씀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대학에서 배운 정치학, 외교사, 철학, 그리고 문학은 내 삶에서 소중한 자산이다. 그것이 생업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게 농촌지도사라는 직업은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또 다른 삶이다. 고향 집 화분에 있는 필로텐드론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조직배양한 개체이다. 감자가 열매를 맺고 씨앗을 품음에도 불구하고 왜 괴경(塊莖)을 통한 영양번식을 택했는지, 또 휴면은 왜 하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도 내가 농촌지도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직업과 자기실현이 일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현직을 포함해 과연 몇 명의 대통령이 정치학을 전공했는가. 하바드(Harvard)에서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에게 사사(師事)한 이승만을 제외하고 기억나는 인물이 없다. 국회를 비롯한 여러 의원들 중 이스튼(D. Easton), 라스웰(H. Laswell), 메테르니히(K. W. Metternich)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국회나 지방의회 의원이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정치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농촌지도사인 내가 그들에 대해 공부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도 없다. 그것은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 되돌아보는 부분이 있다면, 농촌지도사로서 칼럼을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농촌지도사로서 직업적 프로가 되었는지에 대한 성찰의 문제일 것이다.
뚜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가 쓴 [산문시]에 [노동자와 흰 손의 사나이]라는 편이 나온다. 노동자를 위한 혁명을 꿈꾸던 사나이가 옥중에서 노동자와 대화를 나눈다.
자신은 노동자 편이라는 사나이에게 노동자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 자네가 우리 편이라고. 웃기지 마. 내 손을 보게. 자 얼마나 더러운가. 게다가 거름과 타르 냄새까지 풍기는데. 자네 손은 새하얗지 뭔가.” 훗날 흰 손의 사나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는 같은 동료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 녀석이 교수형 당한 밧줄을 구할 수 없을까. 굉장히 큰 복이 굴러온다는데.” 감자와 관련되어 상담을 하던 농민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감자는 심어봤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흰 손의 사나이에게 했던 노동자의 마음이 읽혔다면 과장일까.
물론 나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감자를 심어봤다. 아니 누구보다 감자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농민의 목소리가 여운이 되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족하나, 내 칼럼을 가지고 묻는 분들에게 농민의 목소리를 빌려 전하고 싶다. “그런데, 제 칼럼을 읽어는 보셨어요.”
농촌지도사 장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