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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구미란전투 추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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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구미란전투 추모행사
  • 신성용 기자
  • 승인 2014.12.22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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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갑을 맞은 동학농민혁명 구미란전투 희생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21회 추모행사가 21일 김제시와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유족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제시 금산면 구미마을 구미란전적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김대곤이사장과 전국유족회 김석태회장이 참석했으며 주민들과 유족들의 숙원이던 원평집강소 매입과 복원사업이 확정된 것을 축하하고 차가운 날씨에도 위령제를 준비한 구미마을 주민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추모행사는 2008년도에 창립한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구미마을로부터 157만원의 기금과 위령제를 위임받아서 주관해오고 있다.

원평은 전봉준장군 부대가 공주전투에서 후퇴하고 60007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재기의 항전을 위해 재집결했던 전략적 요충지로 전봉준장군의 활동 근거지이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따르면 원평장터 옛길 어귀의 구미란에서 120년 전 엄동설한에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포를 쏘며 치러진 구미란전투에서 혹은 찌르고 베어서희생된 동학농민군이 37명이라는 관군 측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국제조약과 여론을 의식해 고의적으로 은폐하거나 축소한 정황을 나타나고 있다. 구미란전투에서 일본군의 화력과 신무기에 밀려 동학농민군이 흩어지고 난 후 남겨진 것이 쌀 500, 3000, 탄환 7, 화약 5궤짝, 칼과 창 200자루 등으로 사상자의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피신했던 주민들이 설 명절을 앞두고 불에 타버린 마을로 돌아왔을 때에는 마을뒷산의 주검들을 개가 물고 다녔고 너무 처참해 주민들이 골짜기에 또는 양지바른 곳곳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원평집강소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통해 매입하고 내년까지 건물 복원을 마칠 예정이다. 김제시는 120년 전 마을 뒷산에 묻힌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들의 무덤이 남아있는 구역을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미란 전적지에는 원평집강소의 명성과 함께 매년 1000명이었던 방문객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으나 대형버스의 진입이 어렵고 주차공간과 공중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전무해 방문객 유치가 어려운 형편이다.

김제=신성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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