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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과 이승만’ 대한민국 현대사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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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과 이승만’ 대한민국 현대사 결정적 순간
  • 전민일보
  • 승인 2023.08.2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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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에서 퇴직한 중학교 선배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중년시절 바람을 피웠고, 그 일로 인해 딸은 아버지를 완전히 경멸하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가족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 찼지만, 이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나중의 삶이 참으로 비참해졌다. 딸은 아빠 덕분에 명문대를 졸업하고 전문직으로 잘 성장했지만, 그 실수는 결국 가족 간의 관계에 영구한 상처를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의 풍요와 발전은 기적에 가깝다. 진부한 얘기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외국 용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면서 동시에 가장 민주화된 나라로 성장했다.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한국은 가장 매력적인 나라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한류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유일한 경쟁자는 미국의 할리우드 정도다. 수많은 지구촌 젊은이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글을 배우고 있다. 일제에게 나라도 빼앗기고 동족 상잔의 비극도 겪은 대한민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리에게는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이 있었다. 그는 구한말 일제에 맞서다 사형 선고를 받고 대한제국의 밀사로 도미한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박사는 어려서부터 천재였으며, 단 5년 만에 미국의 명문 대학인 조지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했다. 당연히 예언서가 된 ‘일본 내막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승만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다.

이 책은 미국 지식인들에게 ‘조선’이란 나라를 사실상 처음으로 알렸다. 2년 뒤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자주 독립’을 담은 카이로 선언이 나오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일본 내막기’ 덕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뼈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유상 몰수, 유상 분배’라는 농지개혁을 실행했다. 지주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해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한 죽산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며 농지개혁을 밀어부쳤다.

1950년 8월, 이승만 박사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카투사 제도를 맥아더 장군에게 제안했다. 농지개혁이 없었다면 이 제도는 절대 실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농민의 아들, 즉 카투사들이 미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이었다.

빌 게이츠가 극찬한 조 스터드웰의 저서 ‘아시아의 힘(How Asia Works)’에서는 대한민국의 번영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역사적으로 가정을 세우는 것은 별의미가 없지만, 독립 투사들의 항일투쟁과 이승만 박사의 ‘일본 내막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영원히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 박사의 농지개혁법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현재 우리는 김정은 위원장을 추앙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장면에 이승만 박사가 있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로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렇다고 그의 뛰어난 업적들을 무시하고 비판만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이승만 박사 기념관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7월 15일 이승만 농지개혁을 대한민국 발전의 결정적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이는 다행이라고 느낀다.

첨언하자면 아직도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가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을 이뤘다는 망언을 하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한국인의 문맹률은 80%에 달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문맹률은 고작 10%만 떨어졌을 뿐이다. 반면에 1959년 한국인의 문맹률은 10%로 비약적으로 떨어졌다.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쉽게 알 수 있고,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국민에게 진심이었는지 증명한다. 일본은 조선인을 단지 노예 취급했을 뿐이다.

한승범 버네이즈 아마존출판대행 대표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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