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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受侮)를 견디는 힘, 수치(羞恥)를 모르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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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受侮)를 견디는 힘, 수치(羞恥)를 모르는 힘
  • 전민일보
  • 승인 2023.08.14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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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처음 읽고, 여전히 오래 곱씹고 있는 글 하나가 있다. 바로 유시민 작가의 글 ‘수모(受侮)를 견디는 힘’이다. 설령 정치적 수사를 다 덜어내도 그 글이 주는 울림은 적지 않다. 작가는 수모를 견디는 일이 수치(羞恥)스러운 것이 아님을 강변(强辯)하고 있다.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생업과 일자리를 지키려고 모멸감을 억누르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안쓰러워하고 존경한다. 산다는 것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고 고백하며, 우리 주변 평범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 많은 반성을 해야만 했다. 견디는 이들은 사실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견디는 것이다. 묵묵히. 그러니 이때의 침묵은 지혜로운 힘이자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을 느낄 때도 있다. 필자는 그것을 위의 말과 대비(對比)하여 ‘수치(羞恥)를 모르는 힘’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에 대해 매우 유명한 사례가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매우 사악하고 악마와도 같은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던 나치 독일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저자가 깨닫게 된 것. 그것은 어떤 행동에 있어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을 때(thoughtless) 초래되는 끔찍한 결과가 의외로 평범함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수치를 모르는 힘’은 정말로 무서운 힘이다. 수모를 견디는 힘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힘이라면, 이 힘은 의도치 않게 다수의 타인을 공격하는 힘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수치를 모르는 힘이 늘어나면, 수모를 견뎌야 하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그것도 아주 당연한 듯, 평범하게 말이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자. 159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가 있었다. 그 참사와 관련된 주무장관은 얼마 전, 탄핵 심판 청구가 기각되며 직무에 복귀했다. 당시 헌재는 기각의 사유로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특정인에 의해 발생·확대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장관이 밝힌 첫 입장은 “소모적인 정쟁을 멈추자”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많은 학부모가 당연하고 평범하게 행해왔던 것들이 미투(Me Too) 등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수치를 모르는 힘은 안타까운 죽음을 정쟁으로 향하게 하거나, 갑질을 자식을 향한 애정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수치를 모르는 힘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無知)의 지(知)’가 결코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공자(孔子)의 말처럼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알아야” 비로소 온전한 힘이 된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은 불변의 진리다.

하여 수치를 모르는 힘은 그저 폭력이다. 안쓰럽거나 존경스럽고 위대하다고 평가받을 힘 또한 절대 아닌거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마땅히 존경스럽거나 위대하다고 평가받아야 분들의 힘이 알고 보면, 수모를 견디는 힘이 아니라 수치를 모르는 힘에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모멸감을 누르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라 말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다.

수모를 견디는 힘은 분명 안쓰럽고도 존경스럽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더없이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 하나 수모를 견뎌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만연한 악의 평범성을 두고 개개인의 의지유무를 저울질하는 건, 무척이나 불합리하지 않은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역시나 필자는 말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전히 지혜롭지도, 능력이 많지도 않구나 싶다.

전승훈 문화통신사협동조합 전략기획실장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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