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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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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 전민일보
  • 승인 2016.06.03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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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쏟아진 소낙비가 처마를 타고 떨어지고 있다. 낙수는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처마를 줄 삼아 공중에서 연기를 현란하게 펼친다.

비가 많이 내리면 꽤 체중이 나가는 남자 무용수가 느릿하면서 묵직한 동작을 선보이고, 비가 적게 내리면 날씬한 여성 무용수가 날렵하면서도 선이 약한 동작을 보인다.

바람이 불면 일정하게 선을 이루고 낙하하던 빗줄기가 공중에서 분해하여 굵거나 작은 물방울이 되어 불꽃처럼 퍼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가 지붕에서 잠시 모였다가 다시 처마를 타고 낙하하기 때문에 이들은 짧은 생애에 아찔함을 두 번이나 경험한다.

이들은 일사분란하게 함께 떨어지고 있지만,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늦게 간다고 뒤에서 닦달하는 법이 없고 먼저 가면서 늦게 온다고 채근하는 일도 없다.

다만 서로의 속력을 존중하면서 말이 없는 가운데 순서를 정해 선착순으로 떨어진다. 서로 먼저 가겠다고 아우성을 치거나 경적을 울려대며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

빗방울이 모였다 낙하하는 길은 정체를 빚어 막히지 않고 늘 순조롭다. 그래서 그 길에는 과속을 경고하는 교통 표지판이나, 속력을 감시하는 감시카메라를 한 대도 볼 수 없다. 그저 속력을 빗방울에게 자율적으로 맡기고 있다.

소낙비가 그치고 나자 고운 이름을 가진 해밀에 물기의 허물을 벗은 햇살이 눈부시다.

푸른 잔디밭에 달라붙어 있던 빗방울이 저마다 눈을 감았다. 비록 지붕에서 마당까지 아찔한 거리는 아닐지라도, 자기 몸덩이 몇 곱절된 거리를 균형을 잡고 미끄러져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길을 가는 이들 역시 서두르는 법이 없다. 햇볕이 먼저 든 곳에 짐을 풀고 살던 이들부터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한다.

햇볕이 늦게 든 곳에 임시거처를 마련한 이들은 먼저 떠난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드며 짐을 챙긴다. 잠시 후 땅속에서 해후하기 때문에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원 한 쪽에 비 맞은 작약이 수줍게 젖은 문을 열고 있다. 언제 날아왔는지 꿀벌 몇 마리가 작약의 정원을 통통 뛰어다니며 온몸을 금빛으로 채색한다. 제 문을 햇볕에 선선히 열어주는 꽃잎이나, 그 정원을 활보하는 꿀벌 역시 서로 다투는 법이 없다. 햇볕이 먼저 든 곳에 자리한 꽃잎이 문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이 꿀벌은 작약이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꿀벌은 우리처럼 사다리타기를 하거나 가위바위보 삼세판을 하지 않는다. 묵언 가운데 몸짓과 눈짓으로 순서를 정할 뿐이다.

작약이 핀 아래쪽에 잔디패랭이꽃이 한 가족을 이루며 피고 있다. 꽃이 앞다퉈 피고 있다는 낯익은 말에 대해, 잔디패랭이꽃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키가 작지만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쉬지 않고 꽃을 피운다. 풀이 지닌 끈질긴 생명력과 꽃이 만나 굳은 살을 길러서 그럴지 모른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그는 절대 개화를 서두르지 않는다. 옆 동료가 피었다 지는 때를 골라 제 몸에 꽃잎을 매단다. 그래서 잔디패랭이는 지는 때와 피는 때를 잘 측량하기 어렵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가 비슷하기 때문에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배경이 봄이다.

호강한 시선이 끝나는 종점에, 꽃양귀비가 떼로 피어 있다.

빨강이 너무 진하면 머리에 쥐가 나고 눈이 피곤하다. 그런데 꽃양귀비 색깔은 앙증스러우면서 마음이 짜릿해지고, 눈이 부드러워져 그 은은한 색깔 속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간다. 그 색깔은 금빛보다 고고하고 달빛보다 청아하여 뼛속까지 파고든다.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러한 꽃양귀비도 처음 가지고 태어난 색을 서서히 지우며 야위어간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처음 본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하듯이 서로 피고 지는 속도를 배려한다.

이들 작은 우주 속에 존재하는 속도를 보면서, 육순 문턱까지 달려온 내 삶의 속도계기판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한테 지지 않으려고 신호등을 무시하고 헐떡거리며 과속하기 일쑤였던 삶, 내 속도를 기준으로 삼고 다른 사람 속도를 비난하고 무시했던 삶, 진득하게 기다리거나 참을 줄 모르고 성급하게 설쳤던 삶, 좋은 생각을 하는데 속도를 줄이고, 나쁜 생각을 하는데 급하게 속도를 낸 삶이 꽃처럼 기억으로 피어났다.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다른 사람의 속도를 배려하며 남은 길을 걸어가야겠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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