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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여권통문(女權通文),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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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여권통문(女權通文), 그리고 오늘
  • 전민일보
  • 승인 2014.10.0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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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태 전라북도의회 운영위원장

 
“물이 상하면 반드시 변하고, 병이 극하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중략) 일신우일신 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거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향 귀 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옛날식 규방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1898년 9월 1일자 황성신문에는 역사적인 글 한 편이 게재된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으로 평가 받는 ‘여권통문’이었다. 당시는 여전히 남존여비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인식과 공고한 가부장제 틀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였고, 여성은 그저 남성에 편입된 부속물쯤으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신문에 여성의 권리를 주창하는 장문의 글이 실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자 센세이션이었을 것이다.

여권통문이 주장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문명개화정치를 수행함에 있어 여성들도 동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성도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여성도 남성과 평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지배층 사회는 물론, 일반 기층민에게까지 ‘발칙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통문을 발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찬동자들을 규합하려고 시도했으니 이는 하나의 운동 세력으로서 비춰졌음은 물론, 아예 불손한 세력으로 낙인찍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권통문’의 끝은 이렇게 맺는다.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드시려거든 곧 칙명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구월일일 여학교 설립 발기인 이소사, 김소사”이소사와 김소사라는 다소 특이한 발기인 성명은 실명이 아니었고 익명으로 처리하기 위한 가명 표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통문의 가장 큰 목적이 여학교 설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는 데 있었다는 것인데, 여성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한 가장 첫걸음이 교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권통문’은 약 120년 전의 글이다. 그 때에 비하면 오늘날 여성의 권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크게 신장된 것이 사실이다.

교육만 해도 과거와 같이 여성이 아예 배제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고, 부족하나마 여성의 공직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있으며 가정 내 가사분담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개선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의 여권신장이나 성평등 의식은 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지나온 궤적들은 질곡으로 점철된 역사였고, 그 질곡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이소사와 김소사와 같은 프론티어들의 깨어 있는 의식과 투쟁이 없었다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권통문’의 이소사와 김소사 여사가 주창했던 바를 오늘날 현실에 그대로 대입해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여권통문’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함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괄목할만한 여권신장의 이면에는 여전히 억압받는 여성들의 현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판 씨받이, 갈수록 노골적인 여성의 성상품화, 끊이지 않는 가정 내 여성폭력,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성폭력과 성추행 등 여성에 대한 의식적 차별과 물리적 폭력은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필자도 남성이지만 아직도 성평등에 둔감한 남성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옛날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한 것이라면서 더 이상의 양성평등 주장을 고깝게 여기는 시선이 우리 사회 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만 강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천착하고 조금만 눈을 돌려보자. 여성들을 가두고 있는 굴레는 여전히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다.

본질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여권통문’을 그저 박물관의 전시품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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