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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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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었다
  • 전민일보
  • 승인 2014.04.1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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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농촌지도사

 
난 아직 중국에 가보지 못했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나라 중국, 볼 것이 너무도 많다는 그곳에서 내가 꼭 보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의 능(陵)이다. 지하궁전이 있다는 그곳에는 거대한 비석이 있다. 그런데 그 조형물이 특이하다.

비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은사로부터 그 얘기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매우 궁금했다. 일개 유생의 비석에도 비문이 가득한데 천자라는 황제의 비석에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만력제는 어떤 통치자였기에 비문에 기록된 것이 없을까.

답은 뜻밖에도 지극히 상식적이다. 비석에 기록할 내용이 없어서라는 것이다. 황제에게 이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황제. 만력제에 대한 역사의 평가다.  하지만, 그가 받은 모욕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가 막대한 재화를 투입해 만들었다는 자신의 지하궁전도 온전하지 못했다. 문화혁명 시절, 홍위병들은 만력제와 비(妃)의 유골을 짓부수고 태워버려 이제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 그가 재위한 시절의 한 대목을 극명하게 대변해주는 장면이 있다.
[1587년,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레이 황(黃仁宇, Ray Huang)이 쓴 책 제목이다.
1587년, 명나라의 대소 신료들 중 황제의 얼굴을 아는 신하가 몇 없었다.
은둔해 있는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정에 황제 명에 의한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모처럼, 황제의 명을 접한 대소 신료들은 자금성에 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허탈함이었다. ‘잘못된 전갈’이라는 답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587년 그 해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그해 산동성에서는 기근으로 인해 3천명에 이르는 농민이 집단으로 도적이 됐다. 그로부터 3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통일이 이뤄지고, 5년 후엔 명도 참전하게 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리고 26년 후 마침내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後金)이 건국된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재위기간 중 일어난 사실이다.

만력제는 목숨을 내놓고 실정을 비판한 해서(海瑞)의 간언도, 명나라 최고의 명장인 척계광(戚繼光)의 군제개혁한도, 누르하치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선제토벌해야한다는 요동 순무의 건의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아들의 결혼이나 자신이 죽어 묻힐 능의 조성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불행했던 것은 위기에 대한 당시 조선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587년 그해 충무공은 일본군이 아닌 여진족과의 전투에 나서고 있었고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의 괴로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당파를 모으고 사욕을 채우며 수령은 민생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에서 선조(宣祖)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백성의 입에서 “이 전쟁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거나 “이제야 학정에 시달린 보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분노한 백성들은 피난하는 왕을 향해 돌맹이를 던지고 왕비일행을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왕자들의 향방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일본군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역사가 얘기 하는 진실은 개인과 조직 그리고 사회와 국가 모두에게 경고한다. 위기는 소리 없이 다가온다고.
여기서 한 가지, 의아 하게도 만력제가 거의 유일하게 의욕적으로 한 일이 있다. 바로 조선 파병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만동묘(萬東廟)를 신성시 한 이유다. 우리에게 이 보다 더 무서운 말이 있을까. “아무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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