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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면 더욱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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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면 더욱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
  • 전민일보
  • 승인 2008.09.12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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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다가오는 추석은 나에게는 별다른 추석이다. 왜냐하면 추석 날 당일 내 어머니께서 하늘로 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악성흑색종양이라는 암으로 말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진안. 나는 2남 5녀 중 순서로는 네 번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께서 3대 독자였기 때문에 아들을 귀하게 생각하는 집안이었다. 3대 독자이신 할아버지께서 다행히도 아들을 셋을 두어 자손에 대한 걱정은 크게 없었다. 세 형제 중 막내였던 나의 아버님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이렇게 세 형제를 둔 할아버지였고, 또한 막내아들과 사시던 할아버지의 아들 손자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셨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께서 기다리던 아들은 나오지 않고 줄줄이 딸만 셋을 낳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과거 시대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구박은 가히 상상을 하지 않아도 불 보듯 하다. 당연히 나의 어머니께서도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 그러다가 네 번째 낳은 아들이 바로 나이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가끔 농담으로 하던 나의 말이 “내가 어머니 살려드린 줄 아세요! 만일 그때 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는 아마도 쫓겨나셨을 거예요…….”라고 하면서 웃곤 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이렇게 하여 남동생을 하나 더 낳았고, 또 아들 욕심이 많으셔서 계속 낳은 것이 딸을 둘 더 낳았다. 이놈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욕심을 부리셨을까?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한명이나 두 명만 낳는 요즘의 정서와 문화와는 너무도 다르게 그 시대는 아들에 대한 애착이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가 많았다고 한다.
  힘든 농사일에 자녀를 일곱이나 낳다보니 당연히 힘든 것은 생계와 경제적 상황이었다. 조그만 땅에서 나오는 소출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위의 누나들은 교육 대상에서 열외 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하니 나의 누이들은 다들 자신의 힘으로 어렵게들 학교를 마치기도 하고 결국 학업을 중간에 포기해야 하는 일까지 있었다.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안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40이 넘은 나이에 형제가 있는 익산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그 시골에서 억척스럽게 모아둔 돈으로 이곳에 논과 집을 장만하고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이곳 익산에서의 삶 또한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농사일만 가지고 자녀 일곱을 키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육체노동을 겸하시고 어머니는 시장에 채소를 내다파는 일을 겸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의 어머니는 농사일과 가정일과 시장에서 장사하는 일 모두를 해야 하는 버거운 삶을 사셨다. 아침 새벽이면 전날 밤에 작업한 채소들을 싫고 시장으로 향하시고, 그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5km가 넘는 길을, 그것도 포장도 채 되지 않은 길을 다니셨다. 지금도 내 눈에는 어머니의 버거운 삶의 그늘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하면 자녀들을 키우면서 행복해 하는 어머니의 얼굴과 미소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고 삶의 현장에 다다른 지 1주일 만에 아버님도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세상을 마치셨다. 7년 동안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누워계시는 아버님을 수발하시느라 그 고생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 하늘의 날벼락 같은 청천벽력인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4년째 어머님이 악성흑색종양이라는 암 선고를 받으셨다. 세상의 그 많은 고통을 다 짊어지고 사시고, 이제 조금 편안히 사시나 했는데 잠시 쉴 새도 없이 암과의 투병생활은 시작되었다. 발 뒤꿈치에 콩알만 하게 생긴 갈색반점의 종양이 임파선을 타고 전신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장단지로부터 시작하여 위, 폐 등 혈액을 타고 전신에 흐르면서 종양덩어리가 여기 저기 산발적으로 자라나 결국은 장기를 짓누르게 되면서 그 고통이 심해 웬만한 진통제로는 그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생애 마지막에는 마약과 모르핀을 들이부을 정도로 고통의 강도가 심하셨다.
  추석 전날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는데 계속 나를 깨우시면서 주물러달라고 하셨다. 삶에 지치고 피곤에 지친 몸 때문에 계속 일어나서 어머니의 몸을 주물러드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 이상 기운이 약해지시면서 고통의 고른 숨을 쉬시고 하늘로 가셨다. 다행히 아내가 어머니와 마지막 기운이 다하기 전 “성모님과 함께 편안한 곳으로 가셔 쉬셔요! 라고 어머님을 위로해드리고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머님은 그 뒤로 오늘까지, 아니 하늘에서 만날 때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매년 추석이 되면 나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한번이라도 더 주물러 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한이 되면서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직 부모님을 곁에서 살아계시어 모실 수 있는 사람들이 나는 참으로 부럽다. “비록 아픈 몸으로라도 살아계신다면~”하는 생각을 갖곤 한다.
  추석은 부모님과 가족이 함께하고 나누는 시간이다. 평소 부모님과의 관계가 어려운 가정이 있다면 이 기회에 모두 씻고 화해하는 그런 추석이라도 나에게 있다면 정말 좋겠다. 돌아가시어 못해드리는 효도, 살아계실 제 무엇을 못해드리랴?
 올 추석에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한번이라도 더 해야겠다.

오삼규 / 익산시자원봉사종합센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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