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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고추와 어머니의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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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고추와 어머니의 목걸이
  • 전민일보
  • 승인 2016.10.07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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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이글거리는 오후, 텃밭에 들어서니 고추밭에서 어느새 고추가 익어 붉디붉은 선홍빛으로 강렬하게 눈길을 끈다.

잘 익은 고추를 하나 따서 그 빛이 참 곱다고 느끼며 문득 젊은 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한낮에 장에 다녀온 어머니는 고춧가루 봉지가 든 장바구니를 마루에 풀어놓으며 한숨 섞인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그 한숨엔 알듯 모를 듯 뿌듯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고춧가루가 금값이네.”

아버지의 봉급만으로 육남매와 또한 시누이,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종걸음으로 바빴다.

아침 일찍 열개가 넘는 도시락을 준비해 육남매를 학교에 보내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하고 오후가 되면 장바구니를 들고 매일 시장에 다녀오셨다.

아버지의 봉급날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고 생활비는 거의 바닥난 그 날도 어머니는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향했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당신의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풀어 고춧가루 열근으로 바꾸어 장바구니에 담아왔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 어머니는 거의 이삼일에 한 번씩 김치를 담그셨다.

어머니는 붉은 고춧물이 배인 맨손으로 열무김치를 버무리며 곁에 있던 내게 간을 보라고 김치 한줄기를 입에 넣어 주었다.

미처 김치를 맛보기전에 재채기가 일어났다.

그 날 이후 금값 같은 고춧가루는 나의 뇌리 속에 깊이깊이 각인돼 맵싸한 고춧가루를 생각하면 심한 재채기가 일어나곤 했다.

붉은 고추를 다시 바라본다. 이렇게 곱고 뜨거운 색이 또 있을까?

이 붉은 색은 절세가인이 입은 녹의홍상(綠衣紅裳)의 그 고운 다홍치마의 빛이다. 아니다.

심장의 박동에 맞춰 혈맥을 따라 돌고 있는 혈액의 뜨거운 빛이다. 피조물의 미숙과 허물을 온전한 사랑으로 감싸 안는 절대자의 보혈의 빛이다.

어머니는 새색시의 고운 다홍치마와도 같고, 뜨거운 피와도 같고, 절대자의 보혈(寶血)과도 같은 붉은 고춧가루를 금목걸이와 바꾸어 장만해오셨기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셨을 것이다.

가족들이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고 피와 살을 더해가고 절대자인 대자연의 은총과 사랑을 깨달아간다면 신심(信心)깊은 어머니에게 이 보다 더한 기쁨과 보람이 있으랴?

바구니 가득 고추를 따서 집에 돌아왔다.

손발은 물론 얼굴 까지 텃밭에서 모기떼에게 헌혈한 자국으로 벌겋게 부풀어 올라 가려웠지만 찬물로 세안을 하고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붉은 고추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어슷어슷 썰었다. 신감(辛甘)한 방향(芳香)이 후각을 자극한다.

나는 칼질을 잠시 멈추고 향기요법(香氣療法)이라도 하는 양 고추 한 조각을 집어 들고 매운듯하면서도 단맛이 감도는 그 향을 흡입했다. 이제 재채기는 일지 않는다.

그 아로마(aroma)향으로 심호흡을 하며 다시 칼질을 한다. 어슷하게 썬 붉은 고추 세 조각을 오이냉국위에 꾸미로 얹었다.

생선찌개가 끓고 있는 냄비를 열어 찌개위에도 얹고, 노르스름한 감자볶음에도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명으로 얹었다.

식탁이 갑자기 붉은 꽃잎으로 만발하다. 아, 어머니가 오셔서 이 붉은 꽃잎이 만발한 식탁에 앉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어머니를 향기로운 화원에라도 모신 양 어머니와 같은 그 뿌듯한 미소를 띠고 설렘에 잠겼다.

여름에 햇볕에 말려 갈무리해두었던 마른 고추를 꺼냈다.

태양빛을 온몸으로 흡수해 붉게 익은 고추는 또 다시 햇볕으로 담금질하듯 검붉은 빛을 띠며 바스락 바스락잘 말라 있었다.

마른 고추 한 개를 집어 들어 고추씨의 잘랑거리는 음률을 들어 본다. 고추를 젖은 수건으로 잘 닦은 후 가위로 잘라 금싸라기를 털어낸다.

나는 황금빛 금싸라기를 한 알 한알 손끝으로 모아 목걸이를 만든다. 화사하게 웃고 계시는 어머니의 목에서 금빛 목걸이가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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