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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5.08.2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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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오랫동안 시간강사 신분으로 강의했던 대학에 작년 초 몸을 담으면서 연구실에 세간을 몇가지 옮겼다. 우선 강의할 때 필요한 책 수 십 권과 물을 끓이는 커피포트, 천정에 있는 형광등 힘만으로는 책을 보기 힘들어 스탠드를 챙겼다.

애당초 학교에서 준 큰 책장은 가져 간 책을 꽂고도 공간이 많이 남아 학생들이 쓴 리포트를 보관하거나 사소한 비품을 넣어두었다. 가끔 연구실에 들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책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의실에서 맨 날 하는 이야기가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귀에 못을 박다보니 연구실에 책이 많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것 같다.

어느 날 같은 층에 연구실이 있는 신모 교수님이 책장이 하나 남는다고 하여 ‘문물생심(聞物生心)’이 발동하였다. 기존에 있던 책장 옆에다 책장을 하나 갖다 놓자 휑한 연구실 분위기가 아늑한 맛이 났다.

문제는 기존에 있던 책장이 비어 있던 터에 새로 들인 책장도 비어 있어 이 빠진 치아처럼 보기 흉했다. 그래서 집 서재 책꽂이에 주민등록을 옮기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던 월간 문예지나 계간지, 시집을 틈틈이 이주시켰다.

이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다른 짐에 비해 책 짐 옮기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날 때마다 보자기에 소량으로 싸거나 네 귀퉁이를 신문지로 감싼 다음 노끈으로 묶어 날랐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서점에 들러 지갑에 있는 현금만큼 책을 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일단 책을 사면 맨 첫 페이지 여백에 그 날 기분이나 상태를 간략하게 메모한 다음 책을 산 날짜와 장소를 써 둔다. 그리고 내 이름을 새긴 장서 도장을 찍는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첫 페이지를 펴면 책을 샀을 당시 마음 상태를 자연스럽게 가늠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거의 책을 수집하는 수집광 수준이었다. 이렇게 책을 많이 모으다 보니 서재가 꽤 넓은데도 책을 다 넣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받지 못한 것은 라면박스에 봉인하여 창고 깊숙이 넣어 두었다. 당장 보지 않을 책을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여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구실에 갖다 놓기는 싫었다.

책을 다 채운 책꽂이에 있는 책은 부동자세로 꼿꼿하게 서있다. 사람으로 치면 마치 속이 꽉 찬 사람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다 채우지 못한 책꽂이에 있는 책은 45도나 70도 이상 기울거나 쓰러져 있다.

책장에 있는 책을 보면서 가득 참과 부재, 바름과 기울어짐에 대해 생각했다. 빈 책장에 책을 가득 채웠을 때 책은 바르게 서서 제목과 저자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책을 어중간하게 채우면 책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제목이나 저자를 한 눈에 보기 어렵다.

우리 삶도 책장에 꽂은 책과 다를 바 없다. 우리 내면을 인격과 지혜로 가득 채우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자기 이름값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이 공허하게 비어 있다면 상황과 환경에 휘말려 기울어지거나 쓰러져 존재감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순을 손 안에 두고 지난 삶을 뒤돌아보니 내 삶의 책장에 책을 가득 채우지 못해 기울어지거나 비스듬하게 쓰러진 일이 많았다. 가르치는 선생으로 지녀야 할 인격과 지식, 하나님 자녀로서 가져야 할 믿음, 가장으로서 풍족하게 채워야 할 곳간, 팔순이 다 되신 부모님 아들로 가져야 할 효심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다.

아직도 비어 있어 휑하고 아직도 기울어진 책으로 어지러운 내 삶의 책장에 쌓인 먼지부터 닦아내야하겠다. 그리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책을 꽂아 두는 장식품식 삶을 살지 않고 더딜지라도 정독하고 숙독한 삶을 한 권 한 권씩 꽂도록 해야겠다. 기울어진 책이 꽂혀있고 빈 곳이 있는 연구실에 있는 책장이 부끄럽고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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