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9 13:33 (월)
안명세(安名世)의 죽음
상태바
안명세(安名世)의 죽음
  • 전민일보
  • 승인 2014.01.22 1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상록 농촌지도사

조선 명종실록(明宗實錄) 1548년 2월 14일자 기사에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안명세(安名世)를 당현(唐峴)에서 참(斬)하고, 그의 처자(妻子)는 종으로 만들고, 재산은 관(官)에서 몰수하였다.” 안명세, 그는 누구이고 왜 이런 운명을 맞이한 것일까. 자신의 참수야 그렇다지만, 사랑하는 처자가 종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그는 정말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거열형이 아닌 참수형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는 사육신(死六臣)과 거의 같은 길을 갔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죽음을 향한 여정의 외피 정도에 불과하다. 안명세는 사관(史官)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죽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대한 그의 직필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를 존경한 후대 사관은 그를 한마디로 이렇게 적고 있다. “동호(?狐) 같은 직필(直筆)” 사관이 얘기한 동호(?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으로 어떤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직필함으로써 춘추필법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사관의 표현 그대로였다.

안명세는 결코 동호에 뒤지지 않는 직필로 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시정기로 작성했다.

 

당시 시정기에는 대윤(大尹)인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李?) 등이 많은 선비들을 무고하게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 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연산군(燕山君)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와 비슷한 형국을 만들게 된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돼 시정기를 작성한지 3년 만에 필화(筆禍)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이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이라는 책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이때 안명세가 신뢰하던 동료 사관(史官) 한지원(韓智源)이라는 자가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 정순붕(鄭順朋) 등에게 밀고한다.

결국 안명세는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명종실록에는 그가 심문받을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명세는 형문 1차에 장삼십(杖三十)을 쳤으나, 지난번 공초와 똑같았다”, “추관들이 아뢰기를, ‘안명세는 형추하여도 자복하지 않으니 내일 다시 형추하소서.'(밤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안명세를 세차례 형추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안명세의 죽음을 통해 보게 되는 인간군상의 모습은 그야말로 적나라(赤裸裸)하다.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정신을 가진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꼭 같은 크기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명세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의 처자마저 종으로 만들어버린 이기나 정순붕은 추악함의 본질에서는 종범에 불과하다. 파괴된 인간성의 주범은 안명세가 신뢰했던 동료사관 바로 한지원이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한지원은 안명세와 동시의 사관이었는데, 명세가 직필을 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지원이 반드시 겉으로 칭탄(稱嘆)하는 표정을 내보이곤 하였으므로, 명세는 그를 믿을 만하다고 여겨 조금도 거리낌 없이 직서(直書)하였다. 이때에 지원은 이 사실을 모두 이기에게 통하였는데도 명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가 일어날 때를 당하여 명세가 지원의 집에 가서 자신을 영구(營救)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자 지원이 남에게 이르기를 ‘명세는 참으로 모자란 사람이라 하겠다. 그의 사록(史錄)에 관한 일을 내가 바로 퍼뜨렸는데, 도리어 나더러 시재(時宰)의 집에 가서 자신을 영구해달라고 하는 것은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닌가.’하였다."

인간의 사악함을 이렇듯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창작물이 아닌 실제 우리 역사에 있었던 것이다.

안명세가 죽게 되는 과정을 기록한 사관은 ‘국가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라고 적고 있다.

 

사관의 얘기를 반대로 해석 한다면 조선이 건강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안명세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명세의 최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다.

“그의 사람됨은 단중(端重)하고 과묵하였는데, 처형(處刑)에 임해서도 안색(顔色)이 조금도 변치 않고 평소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우리 모두가 안명세 같은 위대한 영혼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한다면 적어도 한지원 같은 인물이 되지 않을 수는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2024 WYTF 전국유소년태권왕대회'서 실버태권도팀 활약
  • 군산 나포중 총동창회 화합 한마당 체육대회 성황
  • 기미잡티레이저 대신 집에서 장희빈미안법으로 얼굴 잡티제거?
  • 이수민, 군산새만금국제마라톤 여자부 풀코스 3연패 도전
  • 대한행정사회, 유사직역 통폐합주장에 반박 성명 발표
  • ㈜제이케이코스메틱, 글로벌 B2B 플랫폼 알리바바닷컴과 글로벌 진출 협력계약 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