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그 중에서도 내가 울컥했던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만큼 큰 욕이 없던 시절 세 살 된 아들과 뱃속의 아이를 두고 떠나야 했던 윤의사의 모습에 숙연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매헌(梅軒)의 손자로 자처한 사람을 보게되었다. 매헌이 한국독립에 기여한 불멸의 업적과 그에 대한 한국민의 깊은 존경을 생각할 때 우리에겐 그 후손을 각별히 돌봐야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가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정치에도 깊은 관여를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쓴 칼럼도 몇 편 읽었다. 의문은 곧바로 생겼다. 이 사람이 왜 윤봉길의사를 거론하지.
그를 윤의사 손자로 인정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보다 큰 문제는 그가 보여준 인식의 천박함에 있다. 매헌은 결코 일개 당파나 가문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선생의 친손자인 이종걸 국회의원 입에서 우당이 이런 식으로 거론된 것을 본적이 없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 한국인이었는지 몰라서 그랬겠는가.
매헌이나 우당이 공적(公的)으로 언급되는 순간 그 분들은 한국민 전체의 위대한 선조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매헌을 이렇게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람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이런 사람이 고위공직자가 되면..’
나 같은 범부(凡夫)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아마추어적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보통사람들의 상식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불행히도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제 그는 매헌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제사회에 자신과 한국을 각인 시키는데 성공했다. 외신의 주요 장면을 장식한 그의 사진은 한국남자의 평균적 성관념을 대변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가 한국과 미국의 문화차이 운운하는 순간 그것은 더욱 확고한 증거로 자리 잡았다. 성추행과 더불어 계속 되는 거짓말은 이번 참화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반증한다.
적어도 그가 한국과 자신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범한 행동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있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인정하고 있는 부분만 가지고도 그 이유는 이미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한국이 맞이한 지금의 불행은 그가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이 자신의 몫이라고 착각했던 데 있다. 그것이 사적인 영역이라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더 크게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그에게 그런 자리를 마련해준 책임은 별개의 영역에 여전히 존재한다.
한 시인(詩人)의 고백처럼 자신에 대한 주변의 과도한 기대가 주는 압박감은 개인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두렵다면 초야의 필부로 사는 행복을 택하면 된다.
조선 문인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은 그릇이 되지 않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행운이 불행이 될수 있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경고하고 있다.
“내 몫이 아닌 기쁜 일이나 실제보다 넘치는 영예를 사람들은 행운이라 하지만 군자는 불행이라고 한다.(非分之喜過實之榮人皆曰幸君子惟曰不幸)”사족 하나, 그를 매헌의 손자로 생각하는 한국인은 없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장상록 /예산군 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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