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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칼럼]청백리가 그리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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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칼럼]청백리가 그리운 시절
  • 전민일보
  • 승인 2011.01.0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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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펼쳐보기가 겁나는 세상이다. 

몇 쪽 되지도 않는 신문이지만 특히 정치·경제·사회면의 기사는 때때로 우리를 공포와 불안과 우울의 나락으로 떠밀어 넣는다. 

꿈틀거리는 활자가 포탄의 파편인 양 우리네 마음밭으로 우박처럼 쏟아진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배달되는 신문의 활자는 우리를 우박에 찢긴 배추잎사귀처럼 처량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제처럼 오늘도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든다. 행여나 문틈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 같은 밝은 기사가 없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에서다.

 제5의 벽이요, 세계로 열린 창이라는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지켜보아도 결과는 신문이나 대동소이할 뿐이다. 

여전히 답답증은 가시지 않는다. 지난날을 되짚어 보더라도 그렇다. 국회의원의 뇌물외유사건이 터져 하늘을 검게 뒤덮더니, 이에 질세라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선 예체능계 입시부정과 교수 채용비리가 돌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서울 수서지구 택지특혜분양사건이 지축을 흔들며 머리를 내밀었다. 숨을 멈추고, 맑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볼 짬도 주지 않고, 연일 쇼킹한 기사가 잇따른다. 

도처에서 악취가 풍기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서너 명이 모였다 하면 저마다 시사해설가나 추리소설가가 되어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러나 싱그러운 봄바람 같은 처방은 나오지 않는다. 늘상 겪어온 부정, 비리인지라 이제 면역이 될 법도 하건만, 실제론 그리되지 않는다.
 
새로운 기사는 새로운 충격으로 우리를 당혹케 한다. 세상이 그러려니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렇게 생각이 모아지지 않아 탈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없었으면 좋았으리라 여겨지기도 한다.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것이 약이라 하지 않던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치고 용두사미식으로 끝나지 않은 게 어디 있었던가.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일본의 리쿠르트 사건의 멋진 뒷마무리가 부럽다. 

그들 선진국과 견주어 보면 경제력이나 첨단과학분야만 뒤진 게 아니라, 대형사건의 처리능력도 크게 처지는 모양이다.

‘한 달 가까이 신문도 보지 않고, 방송도 듣지 않았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이나 지장이 없었다.라고 갈파한 법정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도 그처럼 고고한 삶을 누릴 수는 없을까. 깊은 산 고적한 암자에서 수도하는 스님이야 가능한 일이지만 나 같은 민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피안일 뿐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세상소식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으면 유비통신이 민초들의 귀를 후비고 말테니까. 8조금법(八條禁法)으로도 오순도순 정겹게 살았던 고조선시대가 그립다. 

날치기수법까지 동원하여 법을 양산(量産)해 내는데도 세상이 요모양 요꼴인 것을 보면, 법이 만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이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집행되는 게 다반사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법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법이 만병통치의 명약(名藥)인 줄 알고 있으니…….
 
국정을 감시하라고 뽑아 준 국회의원이 비리를 저지르다니 이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 논 꼴이 아닌가. 

한낱 청와대 비서관이 국회의원이나 장관, 또 서울특별시장을 떡 주무르듯 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몇백 억 몇천 억 원이란 천문학적인 화폐의 단위가 남의 집 애 이름 불리워 지듯 하는 게 예사로우니, 선량한 월급쟁이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어디에 가서 보상받아야 할 것인가. 

여전히 신문을 뒤적이기에 두려움이 앞선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뉴스에 귀와 눈을 맡겨두기엔 거부감이 인다. 오늘은 또 어떤 기사가 우리를 울분과 한탄에 젖게 하려는지……. 

마치 손에 땀을 쥐며 묘기대행진을 구경하는 듯한 나날이다. 

떵떵거리며 거들먹거리던 전직 장관이나 현역 국회의원들, 족보를 빛낼 줄 알았던 고관대작들이 어느 날 갑자기 쇠고랑을 차고 비굴한 모습으로 우리의 시야에 나타나곤 할 적마다, 민초들은 곤혹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쇠고랑 찬 전 현직 고관의 초췌한 몰골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건 영원히 남의 일일까. 청백리(淸白吏)가 그리운 시절이다.
 
27살에 벼슬길에 올라 30년간 정승을 지내면서도 비가 새는 누옥에서 살았다는 조선조의 명재상 황희가 그립고,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집이 너무 협소하여 비오는 날이면 손님들이 그냥 비를 맞고 기다려야 했다는 맹사성이 그립다. 

퇴계·율곡·다산 같은 큰 학자가 그립고, 정몽주·박팽년·유응부처럼 대쪽같은 절개로 인생을 마무리했던 공직자가 그립다. 

옛날에만 그런 존경스러운 인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당 때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는 외무장관 시절 쓰고 남은 출장비를 반납할 정도의 청백리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영어학원 강사로 생계비를 마련했으며, 손수 연탄을 가는 청빈한 삶을 누리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생을 마감했다지 않던가. 

또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여 초대 부통령이란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렸던 이시영은 조그만 셋방에서 여생을 보냈다지 않던가. 

이처럼 청렴과 결백과 절개를 공직윤리의 으뜸으로 여겼던 고결한 그 선비정신은 어디로 증발해 버렸는지…….  조선조 고종 때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청백리 142명의 사례가 담겨져 있다. 

또 ‘역대 청백리상이란 책에는 고조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청백리 216명의 거룩한 이름이 올라 있다. 하기야 반 만 년의 역사에 고작 2백여 명의 청백리뿐이라면 청백리의 길이 쉽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정부는 오래 전부터 청백리상을 시상해 오고 있다. 그간 수상자는 겨우 20여 명뿐이고, 그중 장관이나 차관은 단 한 명도 없단다. 

그나마 1988년부터는 대상자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니, 부정, 비리의 오염도를 측정할 만하지 않겠는가.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바로잡아야 할 사정기관에서는 과연 몇 사람의 청백리가 배출되었을까. 행여,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나 아니었는지 곰곰 되돌아 볼 일이다.

김 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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