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6 21:28 (금)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누구일까?
상태바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누구일까?
  • 전민일보
  • 승인 2023.10.17 09: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 중국 영역을 완성한 것은 한족(漢族)이 아닌 만주족이다. 아직도 화이론(華夷論)의 망령이 가시지 않은 중국에서 오랑캐로 규정한 만주족왕조인 청(淸)의 위업은 아이러니하다.

만일 중국이 한족의 명(明)을 계승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청의 존재감은 자명하다.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明)의 뒤를 이어 중국을 통일한 것은 누르하치나 홍타이지가 아니라 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다. 그가 황위에 오를때 나이는 불과 여섯 살이었다. 이때 실권자는 숙부인 도르곤이다. 도르곤 사후 순치제가 친정을 하지만 불과 24세에 죽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대한 평가다. ‘순치제의 최고 업적은 강희제(康熙帝)를 낳은 것이다’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순치제는 죽기 전 자신의 후계자에 대해 아담 샬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때 아담 샬은 순치제에게 셋째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를 추천한다.

아담 샬이 그렇게 했던 중요한 이유는 셋째 아들이 이미 천연두에 걸린 경험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 아들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날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순치제는 아담 샬의 조언대로 후계자를 지명한다. 오늘 중국을 만든 강희제의 탄생이었다.

만일 강희제가 아니었다면 대만은 중국사가 될 수 없었다. 티벳이나 신장 위구르 지역에 대한 논리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중국사의 수많은 명군 중에서도 그를 능가할 존재를 찾기 쉽지 않은 이유다. 강희제가 특별한 또 하나의 근거는 후계자인 아들 옹정제(雍正帝)와 손자 건륭제(乾隆帝)가 그의 위업을 충실하게 계승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이 시기 중국은 명실상부한 지구상 최고 제국이었다.

한국사에서 이 시기는 북벌론의 시대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청에 대해 가진 혐오와 적개심은 이해한다. 다만, 금(金) 태종(太宗)이 송(宋)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에게 했던 모욕적 행태와 비교하면 청 태종이 조선 인조(仁祖)에게 요구했던 항복 의례는 대단히 관대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당시 조선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대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묻게 되는 것은 성리학적 명분론이 아니라면 명과 청의 구분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순치제 2년인 1644년 청은 북경에 입성해 중국을 통일한다. 이때 선두에 선 도르곤과 함께 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의 예우는 상당히 각별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현세자는 청의 실상은 물론 세계정세에 대한 이해를 가진 인물이었다. 순치제에게 조언을 했던 아담 샬과도 친교를 나눴다.

그런 소현세자가 조선에 귀환한다. 그리고 얼마 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죽는다.

시신에 나타난 독살 증상, 부왕인 인조의 미심쩍은 대응 그리고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와 남은 아들들에 대한 잔인한 처분 등은 소현세자의 최후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기대한다.

과연 그랬을까? 1645년(인조 23년 4월 26일) 왕세자 졸기에서 사관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후략)”

무인(武人), 노비들과 가까운 것은 물론 화리(貨利)와 토목 공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근대정신에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문약과 신분제를 타파하고 근대적 자본축적과 사회 인프라를 중요시 하는 것이야말로 당시 조선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대 조선에 불편하고 위험한 질병이었다. 소현세자는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다.

소현세자의 적통 원손이 있었음에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어야 했던 것도 인조와 사대부의 그런 이해가 부합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누구일까?

장상록 칼럼리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2024 WYTF 전국유소년태권왕대회'서 실버태권도팀 활약
  • 군산 나포중 총동창회 화합 한마당 체육대회 성황
  • 기미잡티레이저 대신 집에서 장희빈미안법으로 얼굴 잡티제거?
  • 이수민, 군산새만금국제마라톤 여자부 풀코스 3연패 도전
  • 대한행정사회, 유사직역 통폐합주장에 반박 성명 발표
  • 맥주집창업 프랜차이즈 '치마이생', 체인점 창업비용 지원 프로모션 진행